지시를 받은 운전기사는 신호를 무시하며 내달렸고 결국 교통경찰에게 붙잡히자 “수상 각하의 차인데 국회 연설시간에 늦어 급하게 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뒷좌석을 바라본 뒤 “수상 각하를 닮았지만, 처칠 경이 탄 차가 교통 위반을 할 리가 없소. 당신은 교통 위반에다가 거짓말까지 했으니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까지 경찰서로 출두하시오”라며 단속했다.
처칠은 교통경찰의 업무 태도에 감명을 받고 경찰청장에게 특진시킬 것을 명했지만, 이번에는 경찰청장이 “경찰 조직법에 그런 규정이 없어서 특별진급을 시킬 수 없다”고 밝혔다.
그날 처칠은 “오늘 경찰에게 두 번씩이나 당하는구먼”이라고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니면 규범과 규칙에 엄하고, 원칙에 대한 융통성이 없기로 유명한 영국의 실태를 빗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원칙이 조그만 섬나라이면서도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융통성이란 게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작은 성공을 보장해 줄지는 몰라도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일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온 나라를 분노케 한 국정농단사태의 발단을 살펴봐도 결국은 융통성, 나쁘게 말하면 ‘예외’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국민은 그로 인해 비참한 심경 속으로 빠져들었고, 치솟는 분노가 또 다른 예외사태로 치닫는 모양새다.
화난 국민은 국회의 탄핵소추에 이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수용을 촉구하고 나섰고, 한쪽에선 탄핵기각을 요구하며 맞불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화난 국민이 매 주말 광화문과 전국 각지에서 자신들의 뜻을 밝히고 요구하는 것이나, 이에 반대하는 것 모두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다.
그러나 국회의 탄핵소추에 대한 법리적 해석을 담당할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수용과 기각을 요구하는 행위는 국민의 권리를 뛰어넘어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위협적 행위라 할 수 있다.
헌법재판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믿지만, 이들의 행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필자 역시 분노를 넘어 허탈한 지경이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이다.
헌법은 국민의 권리도 담았지만, 그 의무도 함께 담아 놓았다.
누군가가 국정을 농단했다고 해서 헌법적 권위를 초월한 요구를 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그 헌법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를 농단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분노보다는 이성적인 눈으로 헌법을 지켜야 한다.
당장은 국민의 분노를 풀 수 없겠지만, 국가의 먼 미래를 위해 일부 권력들이 헌법을 농단한다면 국민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형될 것도 알았고,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알았지만 ‘악법도 법’이라는 한마디로 자신을 내던졌고, 결국 서구사회는 법에 의한 제도를 완성해 오늘날 민주국가의 틀을 만들었다.
그것이 진정한 국민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