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 동학 정신, 한국의 중심가치로 삼아야

▲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수운 최제우 생가 전경.

수운 최제우(崔濟愚) 는 민족 고유의 경천 사상을 바탕으로 유ㆍ불ㆍ선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한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다.

경주출신으로 조선말기 난세의 나라를 구제하려한 최제우의 사상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 다시 돌아봐야 할 사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제우
그럼 최제우는 누구인가. 여러 저술에서 본 그의 행적이다.

“최제우의 집안은 7대조 최진립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였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한 잔반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지만 과거에 낙방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최옥이 63세 때에 비천한 신분인 곡산 한씨와의 사이에서 1824년 12월 18일 경상도 경주에서 출생했다.

청소년기 최제우의 내면적 갈등은 학문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못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 가문을 위하여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서출(庶出)로서의 자기 처지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 됐다.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했으나 17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3년상을 마친 뒤 정신적인 방황을 하였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됐다. ‘제우(濟愚) ’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는 울산 유곡, 양산 내원암과 천성산 적멸굴, 경주 용담정에서 도를 닦았다. 그러다 1860년 5월 7일 득도를 하여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동학 포교와 교리 정립에 나선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용담가’, ‘안심가’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하다 지역의 유생들에게 밀려 경주를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남원 은적암에서 ‘포덕문’, ‘논학문’ 등을 저술하며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자 경주ㆍ영덕ㆍ대구ㆍ청도ㆍ울산 등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신도를 관장하게 했는데, 1863년에는 접소가 14곳, 교도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해 도통을 잇게 했다.

동학교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西學)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키고, 1864년 1월 18일 혹세무민죄로 경주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됐다가 대구 감영으로 옮겨져 4월 15일 대구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최제우에 대한 신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07년에 사면됐다.

▲ 최제우 동상
동학을 창도한 1860년대에 조선 사회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경북대 주보돈교수의 지적이다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심해지고,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정감록>의 도참사상과 <주역>이나 미륵사상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 등이 민중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방랑으로 농민의 현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사회 현실과 민중의 요구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천시(天時)와 천명(天命)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서교와의 대결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도 경천사상을 되찾아 천도를 받은 새 종교 동학의 창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서 동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동학의 핵심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무학의 서민들이 10여 년의 수학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고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에게도 군자의 인격을 갖출 수 있는 인격적 자존의 길을 열었다.

최제우는 사회사상으로서 후천개벽 사상을 제시했다.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했다.

이처럼 최제우는 시천주 사상에 기초하여 민중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고취했다. 그리고 여러 민중 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제공했다.

그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 事人如天으로 발전했으며,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됐다.

▲ 대구 구미 예천 등 경상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상세히 기술된 책.
동학은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동학의 사상은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궐기한 동학농민혁명이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이를 실증적으로 구명하기 위한 지역별 동학농민혁명 연구 총서가 발간됐다. <경상도 대구 동학농민혁명,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6>이다. 공동 저자인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현 경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특히 신 교수는 선산(구미)지역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평이다.

“선산 지역의 동학농민혁명도 백성들이 내 나라 조선을 지켜 자신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 사건이다. 결과는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덧없이 끝난 듯 보이지만 외세, 즉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왕과 귀족권문(貴族權門)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터전을 위해 싸운 동학농민혁명군의 위대한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것도 선산 지역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들은 진정 주권을 가진 국가의 주인으로서의 의식을 토대로 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선산(구미) 지역민의 가슴에 자랑스러운 역사로 새겨져 전해 오고 있다.”

한 때 동학난으로 알려졌던 갑오동학농민운동의 사회개혁운동에 이어 개항·개화기에 개화운동 편에 서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경영을 통하여 신교육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천도교운동은 신민회운동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2008년 말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최제우와 동학의 인간주의는 더욱 이 시대의 중심가치로 그리고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정모 논설위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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