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회 안동지회 2회 정기대회(1928.1.29)

한국근대사는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시대 과제를 동시에 풀어나간 역사였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이 가지는 정통성과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1894년 일제는 경복궁을 침범하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이때부터 무너지는 국권을 지키려는 노력과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51년간 이어졌다. 무기를 들고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맞섰던 의병들의 항쟁이 있었고, 교육을 통해 지혜로운 백성을 길러 강한 나라의 기초를 닦자는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또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하기도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군인을 길러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무장항일투쟁도 있었다. 침략의 우두머리나 기관을 직접 응징하고자 했던 의열투쟁과 국제정세를 활용한 외교적 노력도 이루어졌다. 그 힘겨운 과정에 경북인들은 누구보다도 앞서 나아갔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봉화읍 해저리)

바른 뜻을 세워 나라 찾는 일에 몸을 던지다

한국근대사는 일제강점과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올곧음, 곧 정의란 국난극복을 위한 구국의 길이었다. 그 길에서 경북은 의병항쟁사의 첫 장을 열었고,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이는 경북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경북은 의병항쟁사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다. 첫 의병인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895~ 1896년 20개 군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영천 일대에서는 정환직·정용기 부자父子가 이끄는 산남의진이, 영덕에서는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의진이 크게 활약하였고, 이어 1907년에는 이강년과 허위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두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일어나 무너지는 국권을 지키려고 하였다.

경북은 자정순국(自靖殉國)이 가장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는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단죄한 의(義)의 길이자, 일제의 통치에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강력한 저항이었다. 자정순국 포상자 61명 가운데 무려 28%인 17명이 경북인이다.

위기 때마다 불타올랐던 의열투쟁의 대열에도 어김없이 경북인이 있었다. 김지섭·남자현·이종암·장진홍·김시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의열투쟁은 자신의 생명까지 던지며 온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 독립의 대의, 즉 올곧은 뜻을 밝힌 것이다. 특히 남자현의 행보는 의열(義烈)의 뜻이 추호도 꺾이지 않았던 경북 여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붓으로 맞서 의리와 지조를 지켜낸 경북인도 빠뜨릴 수 없다. 안동의 류인식은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담은 ‘대동사(大東史)’ 저술에 몰두하였고, 영주의 송상도는 전국 각지를 누비며 애국지사 207명의 약전(略傳)을 담은 ‘기려수필’을 저술하였다. 이는 한 개인의 올곧은 역사적 소명 의식이 낳은 의로운 산물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상화와 이육사로, 이들은 민족 문학의 정수이다.

신간회 안동지회 2회 정기대회(1928.1.29)


국권수호와 독립을 위해 새 길을 열어가다

경북은 유학적 정신세계와 이에 바탕을 둔 사회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무너져 내리자 유림들은 자기혁신을 통해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혁신유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의 학문과 정치·사회 질서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수용하여 민족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협동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세워, 신교육을 통해 대중들을 각성시켜 부강한 나라의 기틀을 만들고자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애국계몽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독립전쟁을 이끌어갔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3·1운동 이후에는 다양한 이념을 수용하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우르고, 더불어 헤쳐 나가다.

경북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통합성이다. 다양한 이념과 방략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경북인들은 힘을 모으고자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광복회와 6·10만세운동은 그 좋은 본보기이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경북에서는 비밀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풍기광복단·민단조합(문경)·광복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광복회는 의병 계열의 풍기광복단과 계몽운동 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이 합류하여 만든 단체이다. 이는 방법과 이념이 달랐던 두 단체가 어우러진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1920년대 들어 독립운동계는 좌우로 나뉘었지만, 경북인들은 1926년 6.10만세운동을 통해 좌우를 아울러내는 초석을 다졌다. 비록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지 못했지만, 6·10만세운동은 이듬해 좌우합작체인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역사의 중심에 바로 경북인이 있었다. 또 나라밖에서 전개된 국민대표회의·민족유일당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만주지역 3부 통합회의에서 보여준 경북인들의 활약은 통합을 지향했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스스로 일어나 구국의 불길이 되다

나라가 무너지는 절망의 시기에, 민족적 울분은 ‘나라 구하는 일’로 터져 나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떨쳐 일어나 한 덩어리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이 그 좋은 사례이다. 경북은 나랏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여기에는 성별과 계층의 구별이 없었는데, 특히 첫 국채보상 여성단체인 ‘대구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3·1운동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을 이루기 위한 범국민적 항쟁이었다. 경북 지역은 서울보다 일주일 늦은 3월 8일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강도는 셌다. 비록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여성들도 “우리들은 여자이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며, 한국 만세를 부른다”고 주창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 무렵 유림들 사이에서는 ‘파리장서의거’가 불같이 일어났다. 이는 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보낸 의거였다. 이 의거에 참여 서명자가 모두 137명인데, 무려 60여 명이 경북 출신이다.

▲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광복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치른 희생도 컸다. 우리의 광복은 강대국에 의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여전히 반쪽의 역사로 남아있다. 올해로 광복 72주년을 맞고 있지만, 광복의 역사는 분단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 많았다. 생각과 방법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통합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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