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감상) 그해 가을 엄마는 마른 짚단처럼 자꾸 푸석푸석해져갔다.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물으면 손사래부터 쳤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가 못마땅해 술을 마시면 언성을 높이곤 했다. 그런 중에도 엄마는 새벽이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여느 때처럼 들판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눈짓으로 엄마를 말리라고 했지만 엄마는 처음부터 소리를 몰랐던 사람처럼 소리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앞으로만 걸었다. 그해 가을이 끝나기도 전 엄마는 다시는 들판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힘없는 발소리가 하늘까지 닿아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듯 아득하고 막막했다. 옥신각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그 논둑길을 아버지 혼자 다녀오시곤 했다.(시인 최라라)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