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성 환인의 오녀산성. 동명왕의 졸본부여일 가능성.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유사는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가 나타나 북부여란 나라를 세웠고 아들인 해부루는 동쪽 가섭원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한편 북부여 해모수의 자손 가운데 한 분인 동명제가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부여를 세웠는데, 이분이 곧 고주몽이고 이 나라가 고구려가 되었다 하였다. 여기에 부여와 고구려의 국가기원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는데, 부여라 칭하는 나라가 여럿 있었고 고구려와 고조선을 연결하는 고대국가였음이 거듭 확인된다.

부여의 기원과 이치, 발전과 쇠망과정은 아직도 장막 속에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예절과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전쟁에 지지않는 동방의 대국이었다고 한다. 부여는 읍루를 복종시켰고 고조선이 사라진 동북 강토를 지켰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부터 494년까지 600년 이상 존속한 예맥계 부여족(夫餘族)의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장춘을 중심으로 하는 흑룡강성과 요녕성을 비롯하여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찍부터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신분계급은 임금과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과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어 생활하였다.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는 부여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 부여는 평화를 사랑했으며, 중원과 사신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고구려와는 경쟁적 관계였다.

중국의 기록에는 부여의 국가기원을 고리국으로 보고 있다. 고리국(槀離國)은 삭리, 탁리국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리에서 고려와 코리아가 나왔다고도 한다. 서기 60년 후한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은 다음과 같이 부여 건국설화를 전한다.

북이(北夷) 탁리국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여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 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에 던졌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도,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고주몽의 전설과 너무나 흡사하다. 다만 삼국유사는 해모수 또는 주몽이고 중국의 기록인 논형 등은 동명왕이다. 해모수와 동명왕, 주몽의 설화는 혼재되어 무언가 중복되었다. 이를 나름대로 계통을 세워 분명히 한 기록은 고려말 충신인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범장(范樟)이 썼다는 “북부여기”인데, 그대로 믿을 수는 없더라더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초대 단군인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고, 제4대 고우여 단군 시대에 고무막이란 영걸이 나타나 남쪽에서 졸본부여를 세웠고 이어서 북부여를 계승하니 이가 곧 동명왕이다. 한편 북부여 2세 모수리 단군의 동생인 고진(高辰)이 한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공을 세며 부여의 거수국인 고구려후가 되었는데, 이 고진의 증손자가 고구려의 시조로 추앙되는 고추가 곧 고주몽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 동부여의 시조는 해부루, 졸본부여의 시조는 동명왕이 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