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라 사람들은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기와 하나가처마 밑으로 떨어져얼굴 한 쪽이금 가고 깨졌지만웃음은 깨지지 않고나뭇잎 뒤에 숨은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나도 누군가에게한 번 웃어 주면천 년을 가는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웃는 기와 흉내를 내 봅니다.[감상] 신라달빛기행을 다녀왔다. 월정교 남문에서 출발해 계림, 반월성, 첨성대 야경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시원한 여름밤, 은은한 달빛, 별빛, 불빛 그리고 행복한 눈빛이 어우러져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었다. ‘웃는 기와’의 소재는 경주 영묘사 터에서 나온 ‘얼
아들아,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다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것을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지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단다계단참에도 도달하고모퉁이도 돌고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을 올라야 했지아들아, 너도 뒤돌아보지 말고 계단을 오르렴주저앉지도 말고앞만 보고 올라가렴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란다쓰러질 때가 아니란다[감상] 20세기 미국 최고의 흑인 시인으로 꼽히는 랭스턴 휴즈는 1902년 미주리주에서 태어났다.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남 탓하지 마라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서먹해진 사이를친구 탓하지 마라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일이 안 풀리는 걸친척 탓하지 마라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초심 잃어가는 걸생계 탓하지 마라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틀어진 모든 것을시대 탓하지 마라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자기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야[감상] 7월이다. 달력 6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음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일은 안 풀리고, 초심은 흔들리고, 모든 게 틀어진 것 같다. 무뎌진 감수성은 외부 자극에 반응이 없다
강으로 내려가 본 적이 있는가새벽 두 시에 홀로강가에 앉아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이 있는가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신이여 축복하소서사랑하는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그녀가 태어나지 말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할렘강으로 나들이새벽 두 시한밤중홀로신이여, 나 죽고만 싶어요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 할까[감상] 랭스턴 휴즈(1902-1967)는 미국의 흑인 시인이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렸다. 휴즈는 “처음 시를 쓰면서 내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블루스 리듬에 맞춰 내 마음속에 그에 걸맞
내가 만일 젊어서 죽거든비 오는 날 질퍽한 풀판 밑저 늙은 소나무 아래 묻어 달라!내 무덤 위에는 비석이 쓸데 없노라.나의 무덤 위에는꽃나무와 푸성귀가 성하리!꽃나무도 풀도 가시덩굴도 그대로 두어 달라!나의 무덤에는 다시 손질 마라!봄에는 꽃이 피고여름에 풀이 파릿파릿 빛나고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고오 겨울에는 가시가 남아 눈 속에 날카로우리![감상] 오늘은 포은중앙도서관에서 한흑구의 한국문학사적 위상과 업적 재조명사업으로 “한흑구의 나무 그늘에 모여앉아 삶과 문학을 이야기하다”라는 북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끝까지
햇살 동터 오는산등성이 아침보랏빛 도라지꽃늦잠을 자고 있다곁을 지나던 노루가보랏빛 꿈이 무얼까가만히 들여다보고 간다[감상] 송찬호는 시인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동시”를 쓰고자 한다며, “동화적 상상력이 현실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유효한 창(窓 )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루가 도라지꽃의 “보랏빛 꿈이 무얼까”라며 호기심을 갖는 순간, 노루와 도라지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동화의 원심력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도라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도라지 뿌리로 만든 약재를 ‘길경(桔梗
큰형 동생네 우리 식구가 모여어머니 수의를좋은 삼베로 미리 장만하자 상의하였다.다소 시적인 어머니 그 말씀 듣고는그 마음 다 알지만세상이 다 수읜데 그럴 필요 없단다.아침 새소리가 수의였고어젯밤 아버지가 다녀가신 어머니의 꿈이 수의였고그까짓 죽은 몸이 입고 가는 옷 한 벌보다헐벗은 마음이 곱게 입고 가는세상의 아름다운 기억 한 벌이세상 그 어떤 수의보다 더 좋은 수의라며여유가 있다면 마당에 꽃이나 더 심으라 하셨다.그 말씀 후 철마다 여름마당에 수국꽃 환한 수의가어머니 잠든 머리 곁에 곱게 놓여있다.[감상] 불두화(佛頭花) 지고 수
능소화는 그 절정에서제 몸을 던진다머물렀던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주고그 너머를 기약하지 않는다왔다 가는 것에 무슨 주석이냐는 듯씨앗도 남기지 않는 결백알리바이를 아예 두지 않는 결백떨어진 꽃 몇 개 주워 물항아리에 띄워보지만그 표정 모독이라는 것 같다꽃의 데스마스크폭염의 한낮을 다 피었다진다왔던 길 되짚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수직으로 진다딱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하는 듯연명치료 거부하고 지장을 찍듯그 화인 붉다[감상] 밀양 ‘제니의 집’은 제종숙 님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소를 키우던 외양간의 대들보와 서까래를 살리고 골동품과 빈티지풍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감상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 대의 기차가 지나가고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감상]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 ‘삽수’를 읽다가 평화로운 아침 독서 시간에 키득키득 웃었
장미 다발을 들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던 팜티마이 아줌마수학 문제를 설명하던 6학년 2반 이서연 선생님서류 가방을 들고 걸어가던 김유성 아저씨마을버스를 운전하던 박미양 기사님모두들 일하다 잠시 멈춰 서서먼 데 하늘을 보는11시 무렵[감상] 오늘은 학부모 공개 수업이 있는 날이다. 교사도 학부모도 아이도 모두 떨리고 설레고 긴장되는 날이다. 사전에 학부모에게 참관 신청서를 받아보니 3분의 2는 오겠다고 하고, 3분의 1은 사정이 여의찮아서 불참한다고 했다. 공개 수업에 부모님이 온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마음가짐은 무엇이 다를까?
매일을 걸어도 그 길이 좋은 것은무심(無心)히 그저 나를 보기 때문이다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신을 신어도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저 무심히 보는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감상] 우울증 환자들에게 공통으로 처방되는 요법은 하루 30분 햇볕을 쬐는 산책이다. 몸을 움직이는 산책과 뇌 속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햇볕 쬐기의 조합은 이상적이다. 포항은 걷기 좋은 길이 많은데, 특히 ‘맨발로(路) 30선’이 인기다. ‘맨발로(路)’는 생활권과 가까운 도시숲, 수변공간 등 자연에 조성된 맨발 걷기가 가능한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애써 밑줄도 쳐보지만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도서관[감상] 2023 서울국제도서전이 지난주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다. 그런데 올해는 시작부터 뒤숭숭하다. ‘문학계 블랙리스트’ 관련 소설가를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에 항의하던 문화예술인들이 황당하게도 대통령실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사슴이 살고 있다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번성하곤 했다는데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속에만 살고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빈자리 같아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기운에 가깝고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돌아오는 것도 같고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숲속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감상] 난설헌 허초희 생가를 찾았다. 강릉 여행 중에 가장 오래 머문 곳이고 가장 가슴 시린 곳이었다
외할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두부가 500원에 세일하니사러 오라고엄마는 차비가 더 나온다고투덜거리다 전화를 끊었다엄마는 암호도 못 푸는 바보 딸이다두부 세일(보고 싶다)사러 와라(보고 싶다)지금쯤 외할머니는 다음 암호를 연구 중일 텐데걱정이다, 우리 엄마[감상] 신혜영 시인의 첫 동시집 (문학동네)을 읽고 느낀 전체적인 인상은 깨끗하고 깔끔하다는 것이다.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엿보이고 건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흐뭇한 동시가 많았다. 동시집 속의 ‘할머니’는 “화초 잘 키우기로 소문”난, “천 번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동짓날 밤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어느새 등 뒤로는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
골짝 물소리가 희다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연둣빛 고기떼들, 물살에 따라 휘어진다별은 뜨겁고 노래는 깊다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내 손을 잡는다노래가 있어 고맙다 네가 있어 고맙다노래는 생의 기쁨, 생의 고통별은 어둠이 있어야 빛나는 법짙은 눈썹의왜가리 한 마리먼 숲을 사무치게 바라보는 아침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감상] 자연주의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이 지난 4일 별세했다. 고등학교 때 그의 피아노곡 ‘‘쌩스기빙(Thanksgiving)’을 듣고 홀딱 반했다. ‘디셈버’(1982)는 내가 처음으로 ‘내돈내산’한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그 시절을 혼자 빠져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거울이 말한다.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형광등이 말한다.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수도꼭지가 말한다.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치약이 말한다.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변기가 말한다.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감상] 여행을 가면 ‘그곳’의 유명한 책방을 꼭 찾아본다. 강릉은 이 ‘그곳’이다. 규모가 꽤 큰 독립서점이었는데 개성 있는 큐레이션과 활발한 문화행사가 돋보였다. 5월, 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 칸에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