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미움도, 좌절도, 버림받아 찢어진 사랑도 걸 수 있는 단단한 것. 절대로, 절대로 안 잊겠노라 못 잊겠노라 다짐으로 꽝꽝 박은 굵고 깊은 것.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못 내려놓을 삶의 증거들이 거기 걸려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대가, 내가 부표처럼 걸어 놓았지요. 아무도 뽑지 못할 조용한 대못 하나, 놀랍게도 거기 기대어 우리 살지요. ( 권선희 시인)
호랑이는 새끼 둘을 낳았답니다 다 자라기도 전에 큰물이 가로막았답니다 한 마리는 돌로 눌러 이쪽 강변에 남겨놓고 한 마리는 입에 물고 강을 건넜답니다 강을 건넌 새끼도 따라가겠다고 울어 돌로 눌러놓고 남은 새끼를 데리러 돌아왔답니다 혼자 남은 새끼는 돌 밑에서 죽었답니다 강을 건넌 새끼도 돌 밑에서 죽었답니다 비 오는 밤마다 호랑이는 개울물을 뜯으며 웁니다 개울물은 뜯긴 포대기를 펄럭이며 웁니다 누가 알까 싶지만 모르는 이 누구겠어요 저 마음. '비 오는 밤마다...
등짝 달구는 뜨거운 햇살 이런 날 빨래했으면 좋겠네 치자꽃향 맡으며 장독 옆 바지랑대 세운 줄에서 음전한 척 바삭바삭 마르며 꽃향에 눈부셔하는 흰 빨래이고 싶어 은근한 내숭 번지는 뒤란 연지곤지 맨드라미 달뜨고 뒤웅벌 잉잉 보채건만 치자꽃은 본 체 만 체 붉그레한 몸매만 매만진다 뻔뻔한 치잣꽃 눈매가 보고픈 날 주먹만한 치자꽃 피는 울안에 우물 있었지요. 이불 홑청을 탈탈 털어 널고 허리 펴는 누이가 있었지요. 맨...
날 찢구 볶데? 날로 먹고 찢어 먹고 구워 먹고 볶아 먹고 데쳐 먹다 튀지 말진저... 튀겨 먹고 지져 먹고 말려 먹다 진국 내어 저도 먹고 두루 쳐 먹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다 돌아봅니다. 마냥 거기서 거기인데도 어찌 그리 조급하게 달리고만 사는지요. 그러는 동안 삶은 찢기고 볶이고 말려지고 튀겨지고 있었네요. 나란히 가는 길을 만나고 싶어집니다. 군데군데 쉼표가 있는 길. (권선희 시인)
평사리 참판댁 문풍지 사이로 밤새 궁시렁대던 늙은 바람이 무딤이들 보리밭으로 마실 나가면 주갑이 아재의 서런 가락은 보리밭 골골이 아려 허치고 필동말동 두리번대던 어린 매화가 투정도 없이 배시시 저 능청스런 추임새 평사리 토지문학관 관장님은요. 봄이면 매화타령 밤이면 술타령 노상 헐헐 하시지요. '궁시렁대'다 '보리밭으로 마실 나가'는 '늙은 바람'처럼 '골골이 서런 가락'을 뽑는 '주갑이 아재'처럼 섬진강 물소리에 장단 맞추며 하동 바닥 떠...
비꽃이 핀다 대지는 눈을 반짝이고 백로 한 마리 여름의 논에 긴 날개 접고 드니 비로소 채색이 되는 잎들 찾아 온 나그네의 이야기에 뿌리는 귀를 모으고 하늘을 본다 날개 펴는 백로에 7월의 논은 분주해지고 이야기는 먼 세상을 그리며 알곡으로 여물 채비를 하고 오래 침묵하는 초록의 합창 비꽃 피는 날 그러네요. 비도 꽃이네요. 저 위에서 수직으로 죽죽 피어오는 꽃이네요. 좋다고 일어서는 대지의 박수소리가 가득해요. 빈 놀이터에도 모처럼...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 호박넝쿨은 자란다 언덕배기 나무 등걸 위로 울바자 위로 너풀너풀 속적삼으로 가린 튼실한 젖통 꺼내놓는다 무수한 사랑 내어놓는다 가랑이 사이로 온갖 풀벌레를 더러는 독사새끼를 키우기도 하며 호박은 검붉은 얼굴로 구릿빛 어깨로 익는다 새마을 기와지붕 위에서도 텅 빈 외양간 위에서도 자식들 다 떠나고 없는 이 집 늙은 부부의 금실로 익는다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 익는다 장마 기운 가득한 오후, 장터 참기름...
차도 위 고양이, 얼마 전에 죽은 고양이 선명한 빨강 피가 마구 칠해져 있던 고양이 차도 위의 고양이, 오래 전에 죽은 고양이 검붉게 엉긴 피가 굳어져 있던 고양이 차도 위의 고양이, 너무 오래 버려진 고양이 달랑 털가죽만 남은 고양이였던 고양이 한 벌 지난 밤 내내 내린 장댓비에 도로가 깨끗합니다. 희날재 오르막에서 잘 마르던 고양이 한 벌은 누가 입고 갔을까요? 개였던 개 한 벌, 청솔모였던 청솔모 한 벌, 고라니였던 고라니 한 벌도 여자였던 여자 한 벌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어느 주검이 키운 목숨인가 지친 삶, 무거운 머리 베개에 누이면 다시는 눈 뜨고 싶지 않은 영원히 잠들고 싶은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번쩍번쩍 일으켜 세우는 아래위로 치훑고 내리훑는 목불인견 잔혹함에도 저는 웃는다지만 눈물이 나는데 누굴까 나를 종일토록 서있게 하는 흔들릴수록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눈앞이 캄캄한 와중에도 총총 별이 생각처럼 차오르게 하는 읍내 한의원 앞 화분에 해바라기 피었어요. 화분보다 더 큰 얼굴을 가느다란 줄기 ...
바다는 하루 아침 강물이 불어나듯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군데 세 군데 무리지어 오는 것이 아니라 억겁의 세월 지나 비바람을 타고 단 한 단의 무게로 다가온다 해수 1그램이 10킬로그램이 되고 다시 10킬로그램이 100톤이 될 때 바다 자체의 중량으로 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림으로써 바다 안의 내가 반짝이는 금물결을 보게 된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바다를 내 안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평생을 바...
아이 성화에 못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 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했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관계를 만든다는 것, 이 얼마나 무서운 질서인가요? 얼마나 징그러운 수습인가요? 위에서 누르고 뒤에서 찌르고 돌아서서 밟으며 만든 평화로움, 저 지독한 투명함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관계는 맺는 것이지요. 아...
피리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 전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래가 되기 위해 대나무 마디 마디 다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마디 푸른 한 마디면 족하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사랑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눈부처로 모신 내 두 눈 보면 알 것이다 고백하기에 두 눈은 바다처럼 넘치는 문장이다 눈물샘에 얼비치는 눈물 흔적만 봐도 모두 다 알 것이다 그래요,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사랑하는데, 내 안에 그 마음 가득 찼는데, 바라보는 내 두 눈 '바다처럼 넘치...
동창들 모여 삼차까지 훑고 나오는 길 한 녀석 다가와 불쑥 소맷귀 잡는다 야, 허섭스레기들 보내고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하자 구겨진 허섭스레기 몇은 택시에 실려 가고 남은 허섭스레기 몇은 또 휘적휘적 뒤따라가는데 그저 그만한 허섭스레기들 오종종 모여앉아 서로 얼굴 비벼대는 밤 목련꽃 송이들 폭죽처럼 팡팡 가슴을 열고 '딱 한 잔만 더 하자'는 '딱' 한 마디에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몰려다닙니...
속의 말 한 번 꺼내 보이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 없이 헤어진 사람 뜬금없이 생각나는 날 살구꽃 본다 이 때쯤이면 져야 하는데, 꽃도 나무도 생각 놓고 살 때가 있는지 살구꽃 아직 붉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 없다지만 더러는 아물지 않는 상처 있다 그대 어떤 문을 두드려 내 마음 열고 빠져 나갔는지 더는 수신할 수 없는 풍경 때문에 아득하여 만질 수 없는 저 거리距離 짐짓 모른 척 하지만, 나무는 깊이 뿌리 내리고, 꽃은 쉽...
엄청 나이를 많이 잡수신 책이 있다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일주문은 초라해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걸어야 옛날 경전에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책으로 생을 연마했으나 철없는 것들이 번역본으로 읽어 오해가 많다 이 책은 원문으로 읽어야 티끌 같은 세상이 잘 보인다 허리 구부정한 부족국가 늙은이들이 불량기 많은 비바람 눈보라 노역을 시켜 단절 없는 인간의 시간을 집필한 오래된 미래 흙으로 만든 책 병포리 비탈에 펼쳐진 책 한 권. 고부랑 할머니가...
마른 저녁길을 걸어와 천천히 옷 벗어 벽에 걸어두고 쌀통에서 한줌, 꼭 혼자 먹을 만큼의 쌀을 퍼 물에 담가 놓으면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 먹는 소리 어머니는 그 소리를 쌀이 운다고 했다 고향이 자주 일어서고 어머니 자주 마음에 오십니다. 감나무 살고 납작한 달이 살고 마른 우물이 사는 외진 곳. '마른 저녁길을 걸어와'서 '한줌/ 꼭 혼자 먹을 만큼의 쌀을 퍼'낸 어머니, 그 어머니가 아느작, 아느작 내게 당도하시는 소리가 도처에서 저리...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이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의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끓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모래밭에 앉아 오래 바다를 바라 본 ...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을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수사에 갔을 때 운수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약국을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주인이 졸고 있는 슈퍼를 지나 비디오 가게를 지나고 머리방을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서 아이들이 버린 놀이터를 지나 네거리 신호등 앞 사랑아, 네게로 가는 길은 규칙이 없다. 놀이터를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고 푸른 등 머리방을 지나고 비디오 가게를 지나 주인이 졸고 잇는 슈퍼를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약국을 지나 영원히……. (감상)동대병원 앞에서 오광장으로, 오광장에서 형산 로터리로 직진하며 공항을, 희날재를, 작곡재를 넘어 저녁마다 바닷가 조...
하루 종일 별 말이 없다 풀 뽑는 손만 바쁘고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에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리 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곡식을 키우며 사랑 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 세월 살고도 부끄럼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어느 한구석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지만 마음을 다 쏟아 '자식을 낳고 곡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