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한 지인이 격리 생활에 들어갔다. 부인과 아이가 오미크론 확진을 받는 바람에 본인이 역격리를 당해 반쪽의 격리를 시작했다. 시내 한 곳에 숙소를 정하고 규칙적으로 향하던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퇴근을 하게 되었다. 처음 그의 표정은 조금 들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혼자 있으면서 할 일을 계획하고 반쪽이지만 전업 작가의 흉내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목소리가 높아진 듯 보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혼자 있어서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유의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아침 운동을 하러 가려고 복도로 나서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희뿌윰한 복도 저쪽에서 긴 뱀 한 마리가 내 쪽으로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나도 모르게 엄마야!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어디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나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당황한 나머지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자꾸 오류가 났다. 허겁지겁 다시 번호를 누르다 돌아보니 이상하게도 뱀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내 쪽으로 오지 않고 멈춰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조금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오세영 시인의 시이다. 벌써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달, 2월이다. 언제나 그렇듯 새해의 각오를 다지고 몇 개의 계획을 세우고 그런 일로 또 몇 번의 모임을 하고 나면 1월은 모래가 빠져나가듯 술술 흩뿌려지고 만다. 그러다 보면 2월이 되었다는 인식도 없이 끝 무렵의 2월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2월은 마치 1월의 꼬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윤보영 시인은 ‘짧아도 아름다운 시간으로 채우면 행복할 2월’이라 했다. 길고 짧음의 문제
얼마 전 간호사 국가고시가 치러졌다. 4년 동안의 긴 학업이 결실을 맺는 자리였다. 간호대학생들은 자칭 자신들의 교육과정을 일컬어 고등학교 4학년, 5학년 등으로 지칭하곤 한다. 학업의 강도가 고3 입시생들과 다를 바 없이 높고 캠퍼스의 낭만이니 하는 호사를 누릴 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선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힘들게 노력한 결과로 얻은 열매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 것이지 그 맛을 아는 까닭이리라.간호대학생은 4년의 교과과정을 통해 사람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 동화로 꼽히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서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을 나누어 주는 삶은, 희생적이고 무조건 적인 사랑에 대한 비유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나무를 빌어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의도는 사람이 그런 사랑을 잃어가고 있음에 대한 일깨움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나무처럼 사랑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니체는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절대적 가치가 그 본질의 의미를 잃고 허무가 만연해진 시대에 대해
해가 바뀌고도 세상은 변함없이 침울하고 어둡다. 사람들의 어깨는 움츠러져 있고 걸음걸이는 빙판길을 걷는 듯 조심스럽다. 점포임대를 내 건 상가들이 즐비하고 휴업을 알리는 식당들도 늘어났다. 놀이터는 텅 비어있고 삼삼오오 재잘대던 아이들의 등하굣길도 보이지 않는다.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이웃과 나누던 소소한 일상은 지난 세기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축복으로 넘치던 결혼식은 간소해졌고 계좌번호로 조의금을 입금하는 조문이 자연스러워졌다. 잠시 폭죽처럼 부풀었던 위드코로나, 불꽃은 채 피지도 못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
어릴 적 나에게 만병통치약은 설탕물이었다.배가 아파도, 목이 아파도, 심지어 고열이 나도 엄마는 대접에다 검은 설탕 한 숟가락을 떠넣어서 휘휘 저어 주는 게 전부였다. 그 달콤한 물 한 그릇 마시는 일은 나에게 큰 행복이었고 그것을 마시고 나면 얼마 있지 않아 신기하게도 감기나 몸살이 뚝 떨어지곤 했다. 그 시절 나는 흑설탕을 약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것이 설탕이고 흑설탕 외에 유기농 원당도 많이 나와 있지만, 그때는 엄마가 설탕 한 봉지를 무척 아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음식을 할 때 조미료의 용도로 쓰는
그곳에 도착했을 땐 바다 위로 내려앉았던 구름이 걷히고 있는 즈음이었다. 안개빛의 바다가 서서히 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도 안이 보이는 투명한 창문을 가지고 있다면 내 마음의 안개가 저렇게 걷히는 모습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최근 주위에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던 공부를 멈춘 친구도 있고 직장을 포기하고 휴양을 떠난 친구도 있다. 가깝게는 입원을 한 지인도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알려진 병,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럴 거라는 말은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가을이 깊어지면서 들판은 온통 꽃 잔치다. 봄에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단풍으로 다시 한번 꽃을 피우고 비탈진 곳이나 수풀이 우거진 사이 몇 계절을 건너온 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다. 가을꽃은 그 빛깔이 환해서 몇 송이만 있어도 방 한가득 빛이 드는 느낌처럼 환해지기도 한다. 나는 이 계절에 들판에서 볼 수 있는 꽃을 통틀어 들국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 야생화를 연구하는 한 분이 그들이 가진 각각의 이름을 자세히 구분해주셨다. 꽃의 크기로 빛깔로 그들의 이름은 각각 구분되어 있었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감국
싱싱한 생강을 고르기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만든 것을 누가 먹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시작단계의 일부분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즈음, 김장을 하는 손들이 분주해지는 즈음이 생강은 제철이다. 주의할 점은 한쪽이 썩거나 곰팡이가 피었을 때 그 부분만 도려내고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성분이 생강에 전체적으로 퍼져있어서 과감하게 통째로 버려야 한다. 씻고 다듬는 공을 들이기 전 발견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더 큰 공을 들여도 포기하고 잊어야 할
나는 시월입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이지만 당신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활짝 핀 코스모스가 있고 진록의 바다가 있고 깃발 휘날리며 돌아오는 만선의 고깃배가 있습니다. 내가 코스모스 한 송이를 강둑에 내려놓을 때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떨거나 가슴에 손을 갖다 댔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바다를 떠돌다 돌아오는 바람을 쓸어 텅 빈 모래사장에 내려놓을 때 당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가장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누군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중심이 되어
태풍이 다녀간 뒤 하늘은 유난히 맑아졌다. 이발소에 걸린 사진처럼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걸려있고 그 위로 더 높아진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다. 하늘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날이 이 계절이다. 지난여름 그 뜨겁던 나날과 회색의 태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마득해진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여름 다음의 가을이라는 계절.조화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긴 것과 짧은 것을 조화라고 할 수 있고 굵은 것과 가는 것, 예쁜 것과 못생긴 것 등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짝을 이루어 잘 어울리는 것을 대체로 조화롭다고 한다. 이것을
그 무덥던 여름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낮아졌고 한낮의 태양도 여름의 뜨거움을 잃었다. 하늘은 높아졌고 대추나 사과 같은 것들이 붉스레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기도 전부터 피기 시작하던 코스모스가 제 빛깔을 완연히 찾아서 하늘거리는 풍경이 눈에 띄기도 하고 짙푸른 녹음으로만 일관할 것 같던 나뭇잎들도 안 웃는 듯 웃는 입처럼 붉은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었다. 시끄러운 세상의 일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계절은 저의 순환을 지키고 제 역할을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제 그만 일어낫!” 놀란 아들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무슨 일 있느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는 아들의 눈길에 짜증이 묻어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변했다’거나 ‘늙어서 그렇다’거나 대체로 이런 말로 가족들은 엄마의 변화를 비하한다. 그야말로 엄마는 무조건적인 사람, 그 모든 것을 희생으로만 끌어안는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린 데에서 온 결과이다. 여자들은 나이 50을 전후로 폐경을 겪게 되고 그 전후로 갱년기를 겪게 된다. 그 시기에 나타나는 증상은 여성호르몬의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중국의 북산에 살고 있던 우공(愚公)은 높은 산에 가로막혀 왕래하는 데 겪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두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둘레가 700리에 달하는 큰 산맥의 흙을 퍼담아서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작업이었다. 우공은 자식들과 함께 산의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에 담아 발해의 은토라는 곳으로 날랐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컴퓨터,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의 혁명이 이루어졌던 3차 산업혁명을 지나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시대가 왔다. 이 엄청난 변화에 사람들은 아무런 대처도 없이 젖어 들고 있다. 적어도 3차 산업혁명까지는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인간의 판단력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등장함으로써 더 이상 사람의 이성과 판단이 필요치 않은 시대가 되어버렸다. 인공지능은 사람과 유사한 사고를 하고, 사람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영화 ‘싱글라이더’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이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연쇄적으로 잃게 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잘나가고 있을 때 아내와 아들을 호주로 어학연수 보낸다.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이 돌아올 무렵 회사가 위기를 맞게 되고 주인공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 아들을 찾아 호주로 갔지만 아내는 옆집에 사는 남자와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아내에게 자신이 왔노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주위를 배회하게 되는 주인공, 남편의 전락을 알지 못하는 아내는 평소와 다름없
초미세먼지가 우리나라 전역을 뒤덮으면서 마스크의 열풍이 일어났다. 홈쇼핑 등에서는 각종 마스크를 앞다투어 소개하고 초미세먼지를 얼마만큼 막아내는지에 대한 광고에 열성을 다했다. 그 후 차츰 진화한 마스크가 등장하였는데 모양이나 크기, 색상 등이 다양하여 어떤 이들은 위생의 개념이 아니라 패션의 일부로 그것을 활용하는 즈음에 이르렀다.마스크는 가면이라는 의미도 있다. 연극이나 각종 연예활동에 쓰일 때는 그런 개념으로 쓰이는 게 보편적이다. 그 외 일반인들에게 마스크는 대부분 위생용품의 개념으로 쓰인다. 감기에 걸렸을 때 자신을 보호하
아침부터 하늘이 흐린 날이다. 커튼을 열고 그 하늘을 거실로 들이면 흐림은 거실보다 내 가슴으로 먼저 들어와 물든다. 그때부터 시작된다, 센티멘털의 끝없는 질주는.커피나 빵 굽는 냄새가 따라오는 건 기본이다. 나는 아직 깨지도 않은 잠 속에서 그 향기를 맡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에프 엠의 클래식, 조금 더 멀리서 오는 나무의 흔들림, 물이 계곡을 타고 흐르고 산이 조금씩 몸을 깨우는 소리….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음미한다. 레이스가 달린 긴 원피스 잠옷 차림의 나는 롤이 적당히 잡힌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슬며시 눈을
다육이는 식물을 키우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라고들 한다. 사막으로부터 온 이것은 물을 자주 줄 필요도 없이 햇살 잘 드는 곳에 놓아두면 된다고 한다. 잎이나 줄기의 모양은 크게 보면 한결같은 듯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잎 하나도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잎이나 줄기, 뿌리 등에 물을 잘 보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육이는 다육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육이가 우리나라에 즐비하다.다육이를 사러 갔을 때 화원의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씩만 물을 주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