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경비원 할아버지들이쌓인 눈을 쓴다장씨 할아버지눈을 쓸다 말고빗자루 옆구리에 낀 채휴대폰을박씨 할아버지에게 건넨다“박씨, 멋있게 좀 찍어봐!올해 첫눈이잖아!”장씨 할아버지개구쟁이처럼 빗자루 짚고 서서활짝 웃는다[감상] 다음 괄호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첫사랑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첫째도 복수형이 될 수 없다. 첫인상도 첫 만남도, 첫 삽도 첫 단추도 첫머리도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은 무한히 반복된다. 해마다 기다리고 해마다 맞이한다. 잘 모르겠으면,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펼쳐보든가 장씨 할아버지처럼
껴안는다는 것은껴안긴다는 것선후가 없고피아가 없고주종이 없고인과가 없고좌우가 없고시말이 없어단순하다선후를 가리고피아를 나누고주종을 정하고인과를 논하고좌우를 가르고시말을 따지면복잡해서껴안을 수 없고껴안길 수 없다언제쯤 단순해질까[감상] 포옹(抱擁)이라는 한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포(抱)는 손으로 감싸 안다, 가슴에 품다, 는 뜻이고 옹(擁)은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껴안는다는 뜻이다. 최근에 누군가를 껴안거나 누구에게 안긴 적이 있는가. 지난 종업식날, 반 아이들을 돌아가면서 꼭 껴안아 주었다. 아이들도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전생이구나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무릎을 세우고 앉아서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저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그것을 꺼내어보는 일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피 묻은 그것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감상]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그대 있음에내 마음에 자라거늘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손잡게 해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그대 있음에삶의 뜻을 배우니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감상] 김남조 시인의 유년은 어두웠다. 아버지와 세 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폐결핵을 앓았지만, 가톨릭 신앙이 그를 시의 길로 이끌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한겨울 출장지에서 과음으로 몽롱해진 아침엄마를 닮은 여인이끓여주는 콩나물국밥을 시켜 먹는다엄마는 겨울이면 방안에서콩나물시루에 콩나물을 키우셨다잠결에 물 흐르는 소리가자장가처럼 자주 들리곤 했다동그란 콩이 노란 껍질 모자를 쓰고베보자기를 들어 올리는 힘을 느끼면서콩나물시루에 날마다 물을 붓고 또 붓던 엄마는사랑과 정성으로 콩나물을 키우듯이 나를 키웠을 것이다자주 물을 주어야 잔뿌리가 생기지 않는다고콩나물시루에 틈만 나면 물을 주던엄마와 이별한 지도 아득해진 세월한 사발 가득하던 콩나물국밥이 비워지는 동안얼었던 가슴이 뜨끈해지고가슴속
쌀 씻는 소리오이를 깎는 소리수박을 베어 무는 소리미닫이문이 드륵드륵 닫히는 소리딱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무엇을 가지고 갈까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조용히 우는 소리틀어놓은 텔레비전 위로막막한 허공의 소리손톱으로 마른 살갗을 긁는 소리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이것 중에 무엇이 좋을까잠시 고민했다이런 거 맞나요?나는 물었고대답은 없었다누가 벌써 대답을 가져간 것일까다 두고 갈 수는 없나요?아주 조용했다누가 벌써 가져간 게 확실했다가질 수 있는 것을가지지 않을 때의 기쁨잠든 사람
새해에는 새옷 하나지어 입을까보다하늘에서 목욕 나온 선녀들처럼헌옷은 훌훌 벗어버리고가쁜한 알몸 위에새옷 하나 갈아입을까보다내가 사는 숲속에는 가시가 많아그 가시에 찢기워 상처 많은 옷흔해빠진 고독이제는 훌훌 벗어버리고새해에는새옷 입고 새로 사랑할까보다가만히 있어도하늘이 가득 차오르는우물 같은 사람 하나 만날까보다누가 와서 훔쳐가도흠 하나 없는 마알간 미소마시면 등골까지 시원해지는새해에는그런 우물 하나마음속에 키울까보다새옷 입고 거기 서서물이나 길을까보다[감상]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는 딸아이 첫 교복을 맞추러 교복사에 들렀다. 예비
그때까지 우리가 바라볼 수 있다면울란바토르에 갈 거야칭기즈칸의 후예처럼 초원의 바람을 가르며서로를 정복하는 데 열 올릴 거야너 나이면, 안 되겠다고잘 훈련된 기마병 되어널 향해 달려갈 거야매일 밤 그 마음을 토벌해한시라도 떨어져 살아갈 수 없도록그렇게 길들일 거야그래, 그때까지 우리가서로의 이름으로 채운다면순간순간 몽골의 아름다운 무사가 되어너를 정복하는데모든 것을 걸어 볼 테야잊는 연습부터 하는내륙의 참한 여인 같은 건절대 하지 않을 거야[감상] “내륙의 참한 여인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칭기즈칸의 후예”인 ‘나’는 ‘너’
오른쪽은 미기왼쪽은 히다리한 번에 외워진 단어라면 지텐샤자전거이다싫다는 뜻의 글자에는자주 여자라는 부수가 들어 있고다른 외국어를 시작했을 때도겪었던 일이다언어 속 낡은여자들의 자리에매번저릿함을 느낀다한편 초보 회화 연습에는비건의 음식 주문한부모 가정의 하루동성 연인을 꿈꾸는 에피소드1월의 카페에 트리가 있고나는 트리 아래 빈 선물 상자들을 보면서외워졌는지외워지지 않았는지무엇이든 떠오르는 생각들을 위한 시간을충분히 가지려고눈은 유키내리다는 후루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하얀 눈이 쌓이는 것을조용히충분히외운다[감상]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달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어너보다 환하진 않지만 작은 촛불을 켰어어스름한 공원에 노래하는 이름 모를 새Where are you? oh you왜 울고 있는지 여긴 나와 너뿐인데Me and you oh you깊은 밤을 따라서 너의 노랫소리가한 걸음씩 두 걸음씩 붉은 아침을 데려와새벽 지나가고 저 달이 잠에 들면함께했던 푸른 빛이 사라져오늘도 난 적당히 살아가 발맞춰 적당히 닳아가태양은 숨이 막히고 세상은 날 발가벗겨놔난 어쩔 수 없이 별수 없이 달빛 아래 흩어진 나를 줍고 있어I call you moonchild우린 달의 아이
동지(冬至), 언제부턴가 박 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향이 태백이라며 배추 농사짓는 홀어머니 걱정에 자주 소주 나발을 불던 박 씨소한(小雪), 노숙에도 룰이 있다 따뜻한 바람 솔솔 나오는 역 대합실 화장실주변 통로는 대빵들의 차지다 지하도 구석 자리는커녕 텃세에 밀려 수원역으로 쫓겨 내려간 노숙자는 그날 밤 한 번 더 서럽게 울었으리라밤새 한파 몰아친 아침이면 대합실 의자에 웅크린 채로 지하도 구석에 엎드린 채로 가린 한 삶의 끈 붙잡고 복사꽃 흐드러진 고향집 사립문 활짝 열어젖히는 꿈 깰까 봐 절대로 그들은 서로를 먼저 깨우지 않는다
날카로운 것들을입속에 넣고 중얼거리다보면동그란 사탕처럼 달고 부드러워진다또 생소한 말들을 혀끝으로 맛보다보면금방 익숙해지는 말과 문장들암송은 부드럽다.내 몸을 휘돌고 난 다음다시 들어온 입을 통해 내뱉는낭송엔 천지의 리듬이사뿐사뿐 곁들여져 있다.그러나 책을 보면서 읽는 행위에는눈을 따라가는 호흡이 거칠고오르막을 오르듯 헉헉댄다.시고 떫은 날것의 맛이 난다.첫 고백의 말투로처음 들은 어머니의 말투로나를 빠져나가는암송은 내 안의 리듬이다.나만 아는 말투와나만 다스릴 줄 아는 감정을 통해꽃향기를 타는 나비처럼날갯짓으로 훨훨 날아가는말의
사월,꽃들의 체취가 터져 나오고 향을 모으는 채집가의 손이 모자란다체향에 민감한 바람, 봄을 통째로 수집해 색색의 향수를 만든다일련번호를 받아든 꽃들 차례로 무르익는다향기와 바람의 전쟁,옅은 벚꽃향은 먼저 향낭에 넣고 무취의 개나리는 품목에서 제외된다농익은 향만 수거하는 바람의 일방적 거래에 꽃은 늘 빈손이다사월이 품절되면아카시아 체액 2g, 꿀벌의 날갯짓 0.3g, 나비의 속삭임 두 방울로 오월을 제조한다불순물이 적을수록 명품,우성 인자인 장미는 첨가물을 삭제한다알고 보면 무색무취의 바람조향사 그를 거치면 흙도 향기를 입는다한바탕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마음 심(心) 자에는 낚싯바늘이 하나 있다잘만 하면 세상을 낚을 수 있지만잘못하면 심장이 꿰일 수 있다[감상]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이정록 시인의 ‘식구’라는 시도 ‘그릇 기(器)’ 자를 오래 들여다보고 쓴 시다. 김선태 시인은 ‘마음 심(心)’ 자에 어느 날 낚인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낚싯바늘’이 예사롭지 않다. 바늘귀, 바늘목, 바늘허리, 바늘턱, 턱굽이, 바늘끝, 미늘, 품, 깊이처럼 바늘 부분마다 이름이 있다. 특히, ‘미늘’은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어떤 계절에 내린 비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나만 애태운다 원망 말고애처롭기까지 한 사랑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감상]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기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남에게 보여주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늘 똑같던 공간이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아직까지 없었던 시간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그래 나는 찬탄하느니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그렇다면 나는 바라건대 마음먹는 대로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감상] 1차원은 점과 선, 2차원은 면, 3차원은 입체 공간이다.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4차원이 되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를
다시 받는다서설처럼 차고 빛부신희망의 백지 한 장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무엇이든 시작하면 잘 될 것 같아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절대로 여벌은 없다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이번만은 기필코......인생에 대하여행복에 대하여건강에 대하여몇 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그러나 정답은 없다그렇다면 나는 지금재수인가? 삼수인가?아니면 영원한 미지수인가?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어둑새벽입니다샛별 빛나고 있는 동녘 하늘만무인 등대처럼 깜박거릴 뿐 네둘레말없이 돌아앉은 것들의 뒷모습은미처 보듬지 못한 나의 인연들입니다풀뿌리처럼 움켜잡고 있던 한 줌의 희망들끝내 꽃송이로 퍼 올리지 못하고메마른 가슴 쓸어내리며가시 밀어 올리던 날들의 사랑은왜 그렇게 자주 다치던지요?늘 어긋나면서 풀리는 길 따라허투루 웃고 울며 지나온 시절의사람들 하나둘 떠오릅니다따스운 손 한 번 건네지 못하고놓쳐버린 인연들여기 죄다 웅크리고 앉아순전히 내 부끄러움으로동트는 하늘 바라보고 있습니다하지만 저기 저 해는푸른 바닷물에 말갛게 씻은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