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만이 그득한 문장에서 마침표보다 순정한 의미는 항상 문장 바깥에서 찾을 것 내 삶의 뒤안이 그러한 것처럼 진실은 언제나 그쯤바람 지나간 자국 위로 수묵처럼 번지는 그림자로만 머뭇거리다가 어둠 속에서는 저 혼자 서성이며 야위어 가는 것 푸른 꿈 너머 거기, 태허의 구름 위를내달리는 부푼 눈망울은 오히려 사치였더라 남루조차도 치열했던 일상이었으니 끝내 외면해 버릴 것시절은 언제나 촘촘한 그물코를 지닌 겨울 빙벽이 공중에 만들어 놓은 허방처럼 위태로운데, 언 시간의 뚫린 구멍으로 봄은 한 발 디밀고,마침내 쏟아지는 눈멀 듯 퍼붓는 청
오늘 밤 드디어 산타 할아버지가 오신다엄마에게 보낼 USB를 머리맡에 둔다영상 편지와 사진 동영상이 담겨 있다나 자라는 모습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내 얼굴 잊지 말라고엄마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산타 할아버지전 선물 안 받을 테니 대신엄마에게 제 선물 꼭 전해주세요[감상] 김사람 시인의 첫 동시집 『학교짱의 전설』(브로콜리숲)에서 한 편을 골랐다. 김사람 시인은 성인시로 등단하여 시집을 몇 권 출간한 적이 있다. 동시집 소개를 보니 “어른이 된 줄 알고 기뻐했지만, 지금은 두 딸이 저를 키우고” 있다며 “경북 어느 초등학교에서
이 세상 그 어떤 책도그대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하리라.하지만 그대를 은밀히그대 자신에게로 돌려보내 주리라.그곳에는 그대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네.해와 달과 별그대가 구하는 모든 빛은그대 자신 안에 있으리라.그대가 오래 찾아다닌 지혜는책 속에 있으니지금 모든 페이지에서 반짝이고 있다네.이제 그 지혜는 그대의 것이라네.[감상] 평일 90분을 출퇴근으로 길 위에서 보낸다. 운전해야 하니 오디오북을 매일 듣는다. 전문 성우가 읽어주니 귀가 살살 녹는다. 올해 재생 목록을 보니 ‘전천당’, ‘운의 그릇’,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
다 비워낸 쪽창 그 하나로도 충분하다무심히 흐르는 달빛조차 조심하고뜨락에 마실 온 파도,바람 재워 숨죽인다혼자서 기루던 마음 해풍에 말리며올듯 말듯 오지 않는 뭍의 소식은 멀어옆구리 파고든 적막,갈필로 우뚝 세우니무엇이었나 손 맞잡고 어깨춤 흥겨웠던나목인 채로 춥지 않던 무욕의 시간들은성글은 무릎 다독여도헐거워지는 이 저녁겨울 끝 한 점 온기가 위로처럼 눈을 뜰 때저마다의 세한, 그 속에서 돋는 질문내 안의 송백은 누구인지,난 누구의 송백인지[감상] 세한(歲寒)이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이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아니면 특제실크덤핑넥타이.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복작복작 밀리며 걷는 내 손엔한 쪽엔 아이스크림 한 쪽엔 풍선.농담처럼 절뚝절뚝 뛰는 지게꾼.그 뒤를 바싹 쫓아 빠져나왔죠.주머니에 뭐가 있나 맞춰보아요.바로바로 올림픽 복권이어요.만약에 첫째로 뽑힌다면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웠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감상] 안도현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이란 누가 누구에게 억지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나누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치자. 시
올해 구십이 된 증조할머니명절 때마다 큰아버지 손 꼭 붙들고- 종득아, 할매 부탁 좀 들어주라부산, 어느 시장에 가몬, 한 알만 먹어도 죽는 약이 있다 카네그 약 쫌 사 주라,늙으면 죽어야 되는데…… 암만 캐도, 그 약을 묵어야 될란 갑다이번 추석에는큰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할매, 사 와쓰예- 으잉, 뭐를 사 왔다꼬?- 부탁한 약 있잖아예,시장 다 돌아댕기서 어렵게 구해쓰예동그란 약을 내보이자마자낯빛이 대번 달라지는 할머니손바닥에 억지로 약을 쥐어 주며- 할매, 한번 드시 보이소입술을 실룩대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앉아천천히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걸요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저것이 헛것인 줄 알기까지한세월이 지났구나밝았던 얼굴, 낭랑했던 음성눈부셨던 둘레에헛것 가득 찬 줄 알기까지한평생이 걸렸구나벼락, 천둥인 줄 알았던 것도 헛것이고젖은 신발인 줄 알았던 것도 헛것이고모래도 헛것이고, 티끌도 헛것이고흰 살결도, 검은 눈물도, 꽃도, 안개도절집도, 성당도, 학교도, 국가도아직 오지 않은 천년도모두 헛것이었구나헛것인 줄 알기까지 한평생이 걸렸구나[감상] 번 아웃과 공황으로 힘든 시절에 혼자 온갖 망상을 지었다가 부셨다가 세웠다가 눕혔다가 당겼다가 밀었다가 불었다가 터뜨렸다가… 혼자서 별의별 짓을 다하고 있
가출했다 잡혀온 내 손모가지 꽉 붙들고엄마는 딱 한마디 했다집에 가자이,아무 말 못하고 엄마 손에 끌려갔다목포역 앞이었다머를 좀 잘못 알았는갑소,잘 좀 알아보쇼이,우리 애기는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니랑께요,경찰서 안이었다머시라도 묵어야 심을 쓰지,한 입만 떠멕이믄 안 되겄소라우,산통 이틀째, 애도 낳기 전에 미역국부터 먹은신천리연합의원이었다평생 단 며칠도 집을 못 비우던 엄마는일생에 단 한 번 순례하듯 마실 다녔다일곱집 돌아가며 밥그릇 채우던석가모니 제자들처럼아이고 내 새끼 왔냐,맨발로 뛰어나오던 가리봉동이었다복숭아 살 같은 물컹한
초음파에 찍힌 태아는 영락없이 자전거를 탄 자세다먼 우주에서 아내의 자궁까지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 틀림없다허방 천지 까마득한 시공을 달려오는 동안삼신할미가 핸들을 잡고뒷좌석에 앉은 아이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을 것이다별자리 체인이 우주 자전거, 탠덤의 바퀴를 돌리는 동안창백한 푸른 점 어딘가에서애타게 자전거 기다리는 부부를 발견한 것이다깊고 아늑한 자궁 속으로 자전거가 점지되던 밤,아내는 처녀 시절 벚꽃 흐드러진 유원지에서처음으로 탠덤에 올랐던 꿈을 꾸었다누군가에게 오롯이 핸들을 맡긴다는 것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페달 밟는다는 것이사
턱걸이 연습할 때나는 연어 같다.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철봉대를 잡고 몸부림치는 나철퍼덕,연어도 떨어지고나도 자꾸 떨어지지만언젠가 연어는잔잔한 강물에 알을 낳고난 턱걸이 몇 개쯤 가뿐히 해낼 거다나는 연어폭포를 힘차게 올라가는 중이다으으으으읏![감상] 이정인 시인의 세 번째 동시집 『한 아이가 있어』(초록달팽이, 2023)가 나와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역시나 따뜻하고 섬세하고 천진난만하다. 「오리 양말」 같은 재미있는 동시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싶다. “오리는 요런 양말을/ 어디서 사 신고 왔을까?” 아이들이 뭐라고 발표할지
그녀는 백설 공주였다 오래된 동화책에 나오는 그 소녀처럼 하얀 피부 빛나는 검은 머리 붉은 입술로 태어났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백설공주라 불렸다자라면 자라는 만큼 그 아름다움도 자랐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매일 속삭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젊은 거울은 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거울에 빠져 있는 동안 많은 왕자들이 창문을 두드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피부는누렇게 얼룩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입술은 항문처럼 쭈글거렸다 사람들은그녀를 백살 공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왕자도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삐걱이는 창문을 열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멈출 것도 무서워지고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주인을 기다리는 잔들이 있었다손님이 잔을 골라 오면 그 잔에 주문한 음료를 담아주는카페였다손잡이는 손을 기다리는 일로 하루를 보낼 테지그런 하루는 참 영원 같겠다, 생각하며잔을 고른다우릴수록 붉어지는 차가 무늬 없는 투명한 잔에 담겨 나온다내가 고른 잔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두렵지만선택했기 때문에 양손으로 감싸 쥘 수 있는 잔이 생긴 것이다손이 기억할 수 있는 크기가 생긴 것이다다른 잔을 골랐더라면 어땠을까안이 하나도 비치지 않는 사기그릇이었다면비밀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발맘발맘이란 그럴 때
1982년 6월 시집 를 ‘납본필증’ 없이 사전 배포했다고 하여이틀간 안기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날 때였다. 퇴계로에서부터 트럭 하나가 우리 뒤를 따라붙더니 중앙청 문공부까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수사관들과 함께 어느 국장 방으로 갔더니 백지를 내밀며 ‘재산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트럭에는 시중 서점에서 압수한 1만여 권의 시집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날저녁 원효로 경신제책에선 나와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형과 함께 시집 1만 권이 분쇄되었는데 분쇄기를 직접 잡은 김 상무의 엄지손가락 없는 오른손이 마
푸른 동해를 누비던 청어 떼도북해도를 헤엄치던 꽁치 떼도과메기가 되려면 구룡포에 와야 합니다.구룡포 투명한 겨울 해풍에얼었다 녹았다.며칠을 덕장에서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바람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뚝뚝 기름이 떨어지고시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붉은 속살이 꼬들꼬들 여물어 갑니다.푸른 동해를 누비던 청어 떼도북해도를 헤엄치던 꽁치 떼도구룡포에 와서야 비로소 과메기가 됩니다.[감상] 과메기 철이다. 과메기 철이 되면 구룡포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바빠진다. 구룡포에 근무할 때 아이들 시중에 “과메기가 엄마를 뺏어 갔다”,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나 그 술집 잊으려네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나 그
박수소리. 나는 박수소리에 등 떠밀려 조회단 앞에 선다. 운동화 발로 차며나온 시선, 눈이 많아 어지러운 잠자리 머리. 나를 옭아매는 박수의 낙하산 그물, 그 탄력을, 튕, 끊어버리고 싶지만, 아랫배에서 악식으로 부글거리는 어머니. 오호 전투 같은, 늘 새마을기와 동향으로 나부끼던 국기마저 미동도 않는,등 뒤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검은 교복에 돋보기처럼 열을 가한다. 천여 개의돋보기 조명. 불개미떼가 스물스물 빈혈의 육체를 버리고 피난한다. 몸에서 팽그르 파르란 연기가 피어난다. 팽이, 내려서고 싶어요. 둥그런 현기증이, 사람멀미가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문 밖 확성기 소리를 듣는다계란…(짧은 침묵)계란 한 판…(긴 침묵)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이게 전부인데,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계란, 한 번 치고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계란, 하고 친다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귀를 잡아당긴다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친다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계란 한 판의 리듬쓰던 시를 내려놓고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감상] 학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