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성이었다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대낮엔 모래 틈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붙었다어둠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북항의 밤은 늘 멀리서 찬란하였다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자신의 바다에서단 한번도 도어(刀漁)가 되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갈라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마지막 실존이었던 은분(銀粉)마저 다 털려유영의 꿈을 접었던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1행이 걸어간다 해바라기 꽃길 따라2행이 걸어간다 랄랄랄 시냇물 따라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 먹으며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감상] 노란버스가 아이들을 울렸다. 수학여행 차량은 노란버스여야 된다는 법제처의 유권 해석이 학교 현장에 큰 혼란을 낳았다. 올가을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던 딸은 수학여행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터뜨렸다. 체험학
음악회 티켓 예매를 하려고ID를 입력하고비밀번호 문턱에서입을 꽉 다문 특수문자 숫자들과 대치 중이다모든 방 비밀번호의 문턱기억의 회로가 얽히고 얽혀매번 입실을 거부당한다연필 자국 꾹꾹 난 종이 공책이 그리운 시간나달나달 닳은 공책 넘기던 유년 시절그 종이 냄새가 문득 코끝을 스쳐 간다나는 노트북 앞에서기억의 해마와 휴전 중이다38선 같은[감상] 올해로 44회를 맞은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은 전남 송강고등학교 2학년 국지성 학생에게 돌아갔다. 국지성 학생이 출품한 작품은 ‘급발진 여부 확인 장치’였다. 국지성
오늘 내가 왜 행복한가 생각해 봤더니어젯밤의 악몽 때문이었다반만 잠든 내가반만 깨어있는 네게로 건너가고 있었다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는데누군가 자꾸 내 몸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너는 차갑고 나는 뜨거웠는데너도 같이 뜨거워져 길길이 날뛰는 순간이 좋았다방 구석구석 헤매며 목 터져라 울부짖는 순간이좋았다네가 반쪽의 내 심장을 차갑게 쓸어내렸을 때나는 꿈이라는 걸 알았다조금씩 네가 되어 싸늘해져가는 손바닥이 간지러웠다[감상] 최라라 시인은 최근에 『당신에게도 꼭 그런 사람이 있기를』(득수)이라는 첫 번째 산문집을 출간했다. 시인은 “누구에
어물전에선 작업가자미를 작가라 부른다머리와 지느러미, 꼬리를 자른 채 가공 공장에서깨끗하고 맛있게 보이도록 꾸민가자미가 작업가자미다바다로 놀러 온 작가들과 술을 마셨다잘 살고 예쁘기만 한 작가들이다아름다운 작가들과 오랫동안 술을 마셨다바다가 곁에 있어, 바다를 손에 쥔 채쓰러지지 않았다[감상] 성윤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멍게』(문지, 2014)는 시인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부둣가를 누비며 쓴 시 74편이 담겼다. 생선 상자를 나르며 주워 담은 활어(活魚)의 시편들이 살아 꿈틀거린다.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
이렇게 날씨 좋으니까 놀아요.비 오니까 놀아요.(눈 오면 말 안 해도 논다.)쌤 멋지게 보이니까 놀아요.저번 시간에 공부 많이 했으니까 놀아요.기분 우울하니까 놀아요.에이, 그냥 놀아요.나는 놀아요 선생님이다.[감상] 전국에서 교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슬픔으로 마음이 무겁고 분노로 머리가 뜨겁다. 책장에서 남호섭 시인의 동시집 『놀아요 선생님』(창비, 2007)을 꺼내 다시 읽는다. 당시 간디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머리말을 썼다. “교사로 살다가 힘겨울 때, 나는 시인이지 하면서 얼른 시 뒤로 숨었다. 시인으
언니는싫어몰라됐거든, 라고만 말하는 사춘기엄마는뻑 하면욱하는 갱년기그 사이에나는숨죽이고 사는 눈치 보기[감상] 제2회 비룡소 동시문학상 수상작인 문근영 시인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깔깔거리며 읽었다. 발상의 참신함, 유머와 재미, 시적 감동과 울림, 천진난만한 동심의 구현이라는 까다로운 심사 척도를 통과할 만하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과 개성 넘치는 목소리가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사족,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았다. 어떤 동시를 소개할까 고민하다가 ‘사춘기’, ‘갱년기’, ‘눈치 보기’로 라임(rhyme)을 맞춰 말의 재미를
계절을 건너가는 새들의 발자국이눈부신 허공에서 환승역을 만든다철새가 밀려가는 길 출렁이며 퍼덕인다발목을 적시며 걸어오는 소리들어느새 바람은 푸른 잡담을 빠져나와체온이 낮은 마을로 그리움을 옮긴다[감상] 시조는 종장(終章)이 중요하다. 종장의 사유와 율격이 시조의 품격을 결정짓는다. 4음보의 안정감 속에 ‘3-4’나 ‘3-5’와 같은 변화를 주면 시조의 묘미를 살릴 수 있다. 시인은 ‘구월’을 ‘환승역’에 빗댔다. 환승(換乘)이란 다른 노선이나 교통수단으로 갈아탄다는 뜻이다. 환승은 피곤하다. 환절기에 춘곤증과 추곤증을 앓듯이, 감기
늦은 밤에 모여 앉았습니다수박이 하나 놓여 있고요어둠속에서 뒤척이는 잎사귀,잠 못드는 우리 영혼입니다발갛게 익은 속살을 베어물 때마다흰 이빨이 무거워지는 여름밤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할까요넓고 둥근 잎사귀들이 퍼져나가다시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까지는요오랜 헤어짐을 위하여둥글게 모여 앉은 이 자들이아버지, 바로 당신의 식구들입니다[감상] 나이를 조금씩 먹어보니 왜 학창 시절에 읽은 시들이, 책들이 중요한지 알겠다. 그것들이 은연중에 자꾸 떠오르고 할머니처럼 그리워진다. 나도 모르게 시구를 문장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있다. 앞으로도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가을 들을 보라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바람도 다소곳하게 앞섶 여미며 난다실상은 천년 인내의 깊이로너그러운 품 넓은 가슴나는(飛) 것의 오만이어쩌다 새똥을 지리고 가면먹물인가 종이는 습자지처럼 쏘옥 빨아들인다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다 받아 주는데도 단 한 발자국이 어려워입 닫고 고요히 지나가려다멈칫 서 떨고 있는 초승달.[감상] 광화문 글판이 새 가을옷을 입었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신달자 시인의 ‘가을 들’에
보이저 씨의 돌잔치는 지구 밖에서 열렸다보름달 위에 차린 돌상 받아홀로 돌잡이를 하였는데웬일인지 보이저 씨는 아무것도 집지 않았다돌상 너머 파랗게 빛나던 구슬은 이미 멀리 있다는 걸보이저 씨는 운명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우주의 품속으로 무작정엉금엉금 기어들어 가기 시작한 건그때부터였다보이저 씨는 이제 서른이다서른 해 동안 한 일이라곤 고작두리번두리번 걸어간 것뿐이다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보이저 씨를 외우며 지나갔다사춘기와 입시의 블랙홀을 간신히 건넜으나무한진공 우주 어디에도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우울증이라는
엄마는공부해라학원가라밥 먹어라해라신을 거느리고선생님은음식 남기지 마라복도에서 뛰지 마라친구들과 싸우지 마라마라신을 거느리는데나는해라신도마라신도물리칠 수 없어자꾸만 자꾸만신나고 싶은데언제쯤나의 신을 만날 수 있을까[감상] 박민애 시인의 첫 동시집 『해라신 마라신』(브로콜리숲)을 재미있게 읽었다. ‘동시 셰프’라고 자신을 소개한 시인의 “시큼한 맛 알쏭달쏭한 맛 텁텁한 맛 이상야릇한 맛 쿰쿰한 맛 눈물 찔끔한 맛”의 “요상한 뷔페” 동시가 이채롭다. 「해라신 마라신」 제목을 보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라탕, 탕후루 이야긴 줄 알았다
그만 가렴 얘야네 잘못이 아니란다너 때문이 아니니그만 돌아가렴.눈이 언제부터 왔는지바람이 흔드는 저 나무바람이 뿌려놓은 저 달빛바람이 주워 담는 저 그림자 위로쏟아지고 있구나쌓여가고 있구나희고 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나뭇가지는 부러지고달빛이 휘어지고그림자가 묻히는구나창밖은 온통 흰 소름적막하구나그만 가렴얘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너 때문이 아니니그만그만 돌아가렴[감상] 시를 읽고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들리는가 분노한 우리의 함성 소리가무너져 간 교실에서 홀로 싸워 온보이는가 새카만 이곳의 성난 파도가제자리를 찾아가길 원하는 것이무엇을 위해 견뎌왔는가이젠 일어나 바로잡으세들리는가 분노한 우리의 함성 소리가무너져 간 교실에서 홀로 싸워온우리 꿈꿔왔던 교육을 되찾기 위하여이제는 더 이상 헛된 죽음 막으리죽음 막으리, 죽음을 막으리![감상]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일대는 전국에서 모인 검은 점들로 인산인해였다. 주최 측 추산 30만 명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서이초 교사 사망 원인을 철저히 수사하고 교권 회복 관련 법안 개정을 서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긁히고 눅눅해진 피부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삐걱거리며 엎드린다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룩거린다풀죽고 곰팡이 슨 허섭쓰레기,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 마다“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오늘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 놈 하나가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
미역줄기 우거진 바다 밑 바위틈에꼼짝 않고 붙어 있는 아빠 노래미.이따금씩 지느러미 부채질하며누가 올까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그린 듯이 망을 보는 아빠 노래미.엄마는 알을 낳고 어디로 갔나?엄마는 어디 가고 아빠 혼자서제 새끼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오늘도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꼼짝 않고 망을 보는 아빠 노래미.[감상] 결국, 사달이 났다.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다. 30년간 134만 톤의 원전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보낸다는데, 40년이 될지 50년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원전 지하의 핵연료를 치우지 않
거울은 빈털터리다우주도 빈털터리다우주라는 말도 빈털터리다빈털터리도 빈털터리다막걸리도 빈털터리다막걸리가 맛있다아, 막걸리가 맛있습니다[감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막걸리는 ‘태화루 막걸리’다. 청량하면서도 목 넘김이 깔끔하다. 퇴근할 때 가끔 로컬푸드 천북농협점에 들러 태화루 막걸리를 모셔 온다. 최근에는 ‘느린마을 막걸리’의 부드러움에 반해서 인터넷으로 막걸리를 주문해서 마신다. 후배들은 하이볼이 대세라며,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를 노땅 취급한다. 나이가 들수록 막걸리가 좋다. 막걸리를 좋아하시는 ‘빈털터리’ 아버지 덕분인가. 나도 빈
애인이여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도중에서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너 대신무슨 풀잎사귀나 하나가벼히 생각하면서너와 나 사이절깐을 짓더라도가벼히 한눈파는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감상] 제목까지 ‘가벼히’가 세 번 쓰였다. ‘애인’도 ‘약속’도 ‘풀잎사귀’도 ‘절깐’도 가벼히 여기겠다는 무애(無礙)의 사랑을 다짐하는 것일까? 사랑이 괴로운 것은 집착 때문이다. 집착의 이면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집착은 관계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사랑은 관계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집착은 분노와 미움으로 곪아
구름을 볼 때마다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그렇습죠 세상에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하늘에 세 들어 사는구름처럼 달처럼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감상] 기세등등하던 폭염이 한풀 꺾였다. 여름내, 영일대 백사장과 송도 솔밭을 오가며 맨발 걷기를 했다. 세족장에서 만난 어떤 할머니가 말했다. “마카다 120살까지 살면 어쩔라꼬 저래 열심이고.” 맞은 편에서 발을 씻던 부부가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