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은 작은 산이다여름내 풀이 자라 장발이 된 왕릉기계로 여럿이서 풀을 깎는다왕릉 위 사람들이 개미만 하다왕릉에서 꼬물꼬물 소인국 사람“임금님! 풀 깎는 소리 시끄럽죠?”금관을 쓰고 누운 임금님 대답,“괜찮아, 시원하다. 아주 시원해.”개미 사람 수십 명이하루 걸려서장발 왕릉을 이발시켰다[감상] 시울림주간을 맞아 시 낭송 강사 두 분을 학교로 모셨다. 형편이 된다면 학급당 시수를 많이 배당하고 싶었지만, 학급수가 워낙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학급당 최소 4시간에서 6시간은 해야 아이들이 시 낭송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지구를 다 돌아다녀도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이 남자일 것 같아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는 남자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감상]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에서 “부부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감상] 가수 양수경은 ‘사
심약한 밤이야성냥만 그어도 찢기는 새벽, 자신을 의심하며 부러지는 연필심나를 해하려 골몰하며 손가락을 깎는 기분을훅― 불어 끄면서창밖으로 쏟아질 생각만 하는나는 너무 묽은 피, 내외가 불분명한 가장 사사로운 상대웃기지?창밖, 제 아랫도리를 빤히 훔쳐보는 가로등겨드랑이에 코 박고 다리 사이에 취한 개의 미간우린 왜 일그러진 데를 좀 더 일그러뜨리는 자신을 쓰다듬고 말까모두들 쪼그리고 앉아 목을 꺾고어머, 꽃 좀 봐사타구니에 얼비치는 자신을 훔쳐보며민감하고 부끄러운 막대기를 직신거리다가 체온 재고 심박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잔에 따르고우
상처라는 말보다는흠집이라는 말이 더 아늑하다마음에, 누가 허락도 없이집 한 채 지어 놓고 간 날은종일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홀로 아득해진다몇 날 며칠부수고 허물어낸 빈터에몇 번이고 나는,나를 고쳐 짓는다[감상] 권상진 시인 덕분에 ‘흠집’이란 말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흠집(欠집)’이다. 하품 ‘흠(欠)’이라는데, 사람이 크게 하품하는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 한다. 하품은 몸에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신체 반응인데, 그런 이유로 ‘하품’, ‘부족하다’, ‘빚’, ‘흠’, ‘결함’까지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
우리 할머니는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탔던이웃집 재택이네 아저씨네마당 앞에 세워진기아 리갈 승용차를보면짬, 짜암하다한다.우리 고모는지금은정동 성 프란치스코 교육원지하 예배당에 있는어릴 적 집에 있던 붉은 피아노를보면짬, 짜암하다한다.나는작년에 전학 간 민우가내 책상 속에 두고 간노란 열쇠고리를보면짬, 짜암하다.[감상] 읽으면서 “짬, 짜암하다”는 ‘참, 짠하다’가 아닐까, 하고 읽었다. ‘짠하다’는 ‘마음이 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라는 뜻이다. 안타깝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아프다는 뜻이 ‘짜암하다’, ‘짠하다’, ‘찐
오늘은 약을 안 먹기로 한다한 번쯤 안 먹으면 어때 하고포기했다가 혼난 일이 있지만그래도 오늘은환자가 아니고 싶고아무 약도 안 먹겠다는무모한 결심을 해 본다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약을 안 먹고 사는 이들이요즘은 제일 부럽네병원에 안 가도 되는 이들이정말로 부럽네그러나 이 한 번쯤이너무 오래가면 안 되겠지오늘 하루만내가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감상] 이해인 수녀는 2008년 대장암이 발견돼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다. 긴 시간을 투병하면서 충실하게 약을 먹는 게 쉽지 않아 주치의에게 자주 혼났다고 한다. “수도 생활을 50년 넘게 했어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았어요나는 천 개의 바람이죠나는 불어오는 천 개의 바람이에요나는 눈 위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예요나는 무르익은 곡식 위에 내리는 햇볕이에요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예요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깨어났을 때나는 둥근 원을 그리며 하늘로 비상하는 조용한 새예요나는 밤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이죠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죽지 않았어요[감상] 참담하다. 끔찍하고 슬프다. 교사에게 학교는 무엇인가. 정녕 학교는 ‘꿈을 꾸는’ 곳, ‘희망을 노래하는’ 곳인가. 아직도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현행범이다활짝 웃는다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따라 웃는다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감상]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웃는 사람의 것이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 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사람이 크게 웃을 때 엔케팔린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암 환자의 통증을 완화하는 모르핀보다 300배나 강하다고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억제하고 장수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억지로 웃어도 효과는 같다. 뇌는 실제 웃음과 가짜
잘 지내요,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내가 하는 말을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나 혼자 듣습니다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꿈속에선 자꾸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폰이시여,내 손안의 작은 왕국에서비밀번호와 패턴이 새로워질수록아무도 풀 수 없도록 하여 주소서카메라 줌이 급식실과 운동장을 잡아당기듯옆 반 그 아이 눈빛을 끌어당겨 주시고오늘 쓸 데이터가 모자라지 않게 하소서내 폰 떨어뜨린 짝꿍을 용서하기 싫으나이번 기회에 새로운 폰이 생긴다면야엄마 구박을 견딜 만한 힘을 주시고아빠 카드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다만 약정 끝날 날을 기다리느라휴대폰 가게 알림판만 보이나이다[감상] 문봄 시인의 첫 동시집 (상상 동시집 20)를 즐겁게 읽었다.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산을 오르다가내가 깨달은 것은산이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말 많은 세상에부처님도 말이 없고절간을 드나드는사람도 말이 적고산을 내려오다가내가 깨달은 것은이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말이 없는 세상에사람보다는부처님이 더 말을 하고부처님보다는산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감상] 작년 여름에 혼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적이 있다. 뚜벅뚜벅 오르고 휘청휘청 내려오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져 계곡에서 미끄러지고 쥐가 나서 종아리를 움켜잡았지만, 지리산은 말이 없었다. “말 많은 세상”, 그 푸르디푸른 침묵이 그립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감상] 2023 청포도 문화 축제에 다녀왔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밭, 삼륜포도원이 있던 곳이다. 1937년, 잦은 옥고로 건강이 나빠진 육사는 요양을 위해 포항 송도에 머무르던 중 삼륜포도원 바닷가 언덕에 자주 올라 영일만 바다를 바라보기 좋아했다고
바닷가에 매어 둔작은 고깃배날마다 출렁거린다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중얼거리려고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감상] 시인들의 시인, 김종삼 시인의 전집을 읽는다. 김종삼 시인의 시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읽을수록 울림이 층위가 다르다. 클래식의 향기가 난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에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감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고마운 ‘그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본다. 시
나는내 못생긴 코가밉다.꽉 꼬집어 주고 싶도록밉다.그런데엄마는,일을 골똘히 할 때면콧등에 송송송 땀이 맺히는내 코가예쁘단다.꼭 꼬집어 주고 싶도록예쁘단다.[감상] 열등감이란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사람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을 말한다. 콤플렉스, 욕구불만, 강박관념으로도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열등감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했다. ‘나’는 “내 못생긴 코”가 밉지만, 엄마는 그런 “내 코가 예쁘단다.” 영화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때 목수의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감상] 목공(木工)을 배우면서 집과 직장의 가구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감상] 시(詩)는 본디 노래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미국의 위대한 대중음악 전통 안에서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 그가 노래의 형태로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그냥 둬 보자는 것이다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그러니 그냥 둬 보자는 것이다[감상] 2
사는 일이 강퍅하여우리도 가끔씩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그래서 머릿골 속에 조금 맺힌 꽃봉오리가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부용화나 능소화나 목백일홍 같은 것들은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정면으로 핀다그래 나 미쳤다고 솔직하게 핀다한바탕 눈이 뒤집어진 게지심장이 발광하여 피가 역류한 거지거참, 풍성하다 싶어 만질라치면꽂은 것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내뺄 것 같은예측 불허의파문 같은폭염 같은깔깔거림이작년의 광증이 재발하였다고파랗게 머리에 용접 불꽃이 인다고불쑥불쑥 병동을 뛰쳐나온 목젖 속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