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인생 끝자락에 얻은 은일의 삶…신선인들 부러우리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의 자취를 찾아 만휴정으로 간다. 만휴정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산 중턱에 있다. 묵계서원(黙溪書院)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을 끼고 소로를 들어가면 평범한 계곡이 나오는데 묵계다. 이름 그대로 조용한 계곡이다. 소나무와 암반 계곡이 절경인 이곳은 본래 송암동(松巖洞) 계곡이었는데 김계행이 만년에 정자를 지으면서 묵계로 불렀다. 계곡 입구에 만휴정 원림 안내 간판이 나오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얼마지 않아 소나무 숲 사이로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펼쳐진다. 멀리서 보는 만휴정 풍경이다. 수직의 암반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물이 떨어지는 소(沼)에는 하얀 포말이 인다. 이태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다’ 중 ‘삼천척 높이를 곧장 내리쏟아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하구나’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송암폭포다. 폭포 위 소나무 가지에 자려 반쯤 자태를 드러낸 정자가 만휴정이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다. 명승 제82호의 위엄이다.
몇 년이나 황폐해져 있었던가
고상한 풍모 붙잡을 수 없지만
남긴 자취 지금까지 전해지네
은하수 떨어져 골짝 트였고
푸른 바위 앞에 문이 열렸네
비록 멋진 경치 맛보긴 했으나
졸렬한 시구 제현에게 부끄럽네
만휴정은 김계행이 71세(1501년) 때 지은 정자다. 김계행은 50세에 과거에 급제해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나이 많은 급제자를 우대하는 연만으로 곧바로 6품직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을 시작으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까지 올랐다. 벼슬살이를 하기 전 41세에 동갑 나기 절친인 김종직과 ‘주역’ ‘근사록’을 강론하며 도의지교를 맺었고 그 후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먼 길을 찾아가며 만나는 등 우의를 다졌다.
김계행은 청백과 강직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비슷한 또래의 장조카가 학조대사(學祖大師)다. 학조대사는 국사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성주에 와서 성주향교 교수로 있는 그를 찾았다. 시골 향교 교수를 하는 숙부가 짠했던 모양이다. 벼슬자리를 하나 알선해보겠다고 넌지시 운을 띄었다. 김계행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을 보겠느냐”고 거절했다. 오히려 숙부를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아 피가 나도록 매질을 했다. 성주에 도착한 뒤 숙부를 찾아오지 않고 오라고 한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김계행이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은 때는 정국이 복잡하고 불안하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대사간으로 지내던 김계행은 68세가 되던 해 고향 길안면 묵계로 돌아왔다.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 이름했다. 여생을 후학이나 가르치며 한가하게 보낼 작정이었다. 세상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김종직과 동갑나기 절친이었던 그는 무오사화에 연루돼 성희증 조호문 등 10명과 함께 태장을 맞고 석방됐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처형당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유배를 갔다.
만휴정은 이런 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이름이다. 외할아버지 남상치가 지은 쌍청헌 자리다. 50세의 늦은 나이로 관직에 첫발을 디뎠고 수차례 사직 소를 올리고 잦은 이직과 체포 구속 끝에 얻어낸 은일의 삶이다. 이름 그대로 ‘늦게 얻은 휴식’이다. 그는 집이 있는 보백당과 만휴정을 오가며 간난신고 끝에 얻은 평화를 마음껏 즐겼다. 다섯째 아들 극신이 무과에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외손 박거린과 박형린이 대과에 급제했을 때는 사위 박눌까지 와서 잔치를 벌였다. 김계행은 1517년 (중종12) 보백당에서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정면을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정자 안에는 김양근의 만휴정중수기와 김양근, 김굉, 이돈우 유도원 김도행 정박등의 시가 걸려있다. 김계행의 트레이트 마크가 된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과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자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층층이 급한 물 쏟아져 내리니
물 돌아가는 곳에 저절로 물가마가 생겼구나
십장 높이에 옥처럼 푸른 빛 떠오르니
그 속에 신의 손길이 담긴 물건이로다
폭포와 연못은 가끔씩 널려 있고
너럭바위는 넓게 펼쳐져 있구나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돌과 같으니
가히 백 사람쯤은 앉을 수 있겠도다
앞을 보니 세 개 물가마가 어울려 있어
시흥이 날개 짓으로 솟구쳐 오르네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웃음을 다투고
마치 산 전체가 물속에 든 형국이로다
- 김양근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