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에 걸터 앉으니 가을빛 머금은 낙동강이 한눈에

하목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정자다. 인조가 능양군시절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유숙했던 곳이다.
하목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있다. 하목정의 ‘하’와 적산 마을의 ‘산’을 땄다. 하목정이 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길게 흐르고 뒤로는 동산을 빼곡이 채운 대숲이 아름답다. 정자에서의 첫 인상은 ‘소쇄’하다는 느낌, 맑고 깨끗했다. 정자에 앉으면 서쪽 들창문 사이로 멀리 낙동강물이 보인다. 강물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등에 업고 멀리서도 눈부시다. 정자 담장 밖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족들이 한 폭의 풍경이다. 정자의 병풍 노릇을 하는 대숲은 더러 바람을 쏟아냈는데 숨을 크게 들이 쉬며 바람을 받아들였다. 바람은 오장 육부에 이어 영혼에 낀 먼지까지 털어내 갔다. 기분 좋은 털림이다. 정자 뜰에는 목백일홍이 여러 그루 있다. 백일홍이 꽃을 활짝 피운 여름 풍경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정자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뜰에는 목백일홍이 여러그루 서 있다.
하목정 뒤에 있는 전양군 이익필의 불천위 사당과 400백년된 목백일홍.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었으나 방으로 사용하는 정면의 동쪽 한 칸은 측면 4칸으로 만들어 전체적으로는 ‘T’자형 구조를 이뤘다. ‘ㅡ’자형 정면 3칸, 측면 2칸 마루에 정면 1칸 측면 4칸짜리 ‘l’형 방을 덧대어 붙여놓은 형태다. ‘ㅡ‘자형 마루는 팔작지붕으로 ’l’형방은 맛배지붕으로 세워 한 건물인데도 블록으로 짜 맞춘 듯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전의 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 미상)이 지었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사원, 손처눌등과 함께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면 대장(西面大將)으로 활약했다. 초유사 김성일의 표창을 받고 추천으로 세 고을의 수령이 됐다. 정유재란 때도 팔을 걷고 나섰다.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됐다.


노후에 하목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하목정 이름은 초당사걸로 오언절구에 뛰어났던 당나라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 滕王閣序’ 중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 色)’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검은 점으로 날아가는 따오기’,정자 이름에서 한 폭의 수채화를본다.

인조가 친필로 쓴 하목정 편액.
현판 글씨는 인조의 어필이다. 인조는 왜 화목정 현판 글씨를 썼을까? 인조가 능양군 시절 때 일이다. 왕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 광해군이었다. 광해는 미쳐가고 있었다. 동생 능창군이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에게 죽었다. 아버지 정원군도 이 일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 분노와 치욕, 불안이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암울한 시기였다. 광해군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능양군은 경상도로 발걸음을 했다.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영남대로는 세 갈래다. 좌도는 울산 경주 영천 의성 안동 죽령 단양을 잇는 보름길이었다. 중도는 부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 상주 조령 이천 광주 등을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도는 김해 현풍 성주 금천 추풍령 영동 청주 죽산 양재를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엿새 길이었다.


능양군은 중도로 길을 잡았던 모양이다. 상주에서 배를 타고 하목정 나루터에 내렸는데 하목정의 아름다운 풍광에 눈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해질 녘 낙동강에 내려 앉거나 강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철새가 장관인 곳이다. 하목정에서 그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양군은 아름다운 정자에서 유숙했다. 하루라는 말도 있고 제법 머물렀다는 말도 있다. 선조의 손자이기는 하지만 절대 권력자, 광해의 눈총을 받고 있는 왕손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조는 그때 일이 오래 가슴에 남았을까?

인조의 명으로 만든 부연. 처마에서 덧대어 서까래다.
인조가 ‘하목정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이종문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지영(之英)이 벼슬자리에 올라 경연관으로 대궐에 나타났을 때였다. 인조가 지영을 알아보고 옛일을 회상하며 물었다.

“너의 집 하목정은 풍광이 아름다운 정자인데 왜 부연 달지 않았느냐?”

지영은 “사서인(士庶人)의 사가(私家)에는 부연을 달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인조는 “이 같은 강산경치가 좋은 정자는 사가(私家)와는 다르니 지붕을 고치고 부연을 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저 황송하기만 한 지영이 “ 부연을 달겠지만 임금이 유숙하던 곳이니 앞으로는 출입을 금하고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엎드려 말했다.

인조가 말했다. “그럴 것 까지는 없고 내가 유숙했다는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친필로 하목정 편액을 내려줬다. 부연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내탕금에서 은 200냥을 내렸다. 하목정 창수전말 기록을 재구성했다.


부연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말하는데 왕궁에서나 할 수 있는 건축 기법이다. 하목정은 조선의 내로라는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체제공, 현종 때 문인인 정두경과 남용익, 이덕형 등의 시판 14개가 걸려 있다.


강 물줄기와 산세가 길게 뻗었는데
멀리 펼쳐진 들판의 아름다움 그리기도 어렵구나
새벽안개와 연기와 섞여 물가에 잠겨 있고
저녁 석양빛은 강물 위에 출렁이네
서산의 가랑비에 주렴 안도 시원하고
남포 노을은 새 등에 반짝이네
애석하구나 황자안이 아무 말 남기지 않았으니
좋은 경치 감상하며 술과 벗하네

- 한음 이덕형의 시 ‘하목정’


하목정을 그린 시는 18수다. 이 가운데 10수는 이종문 일가의 문집인 ’전성세고‘ 중 이종문의 문집인 ’낙포집‘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체재공의 ’하목정 원운‘시판이 이곳에 걸려 있는 점이 석연치 않다. 채제공은 178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파면돼 한동안 마포에 있는 김씨 정자에서 우거 했는데 이 정자 이름이 ‘하목정’이다. 따라서 달성 하목정에 있는 체제공의 시 하목정은 마포의 하목정을 보고 지은 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운데가 하목정 오른쪽이 안채, 맨 뒤의 높은 곳이 사당이다.

이종문이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뒤 자손들이 잘 풀렸다. 첫째 아들 수월당 지영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등에게서 공부를 한 뒤 문과 병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직강 예조좌랑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이첨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울진현령을 맡았다. 미수 허목은 이지영의 묘갈명에 “광해군 말년에 조정의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하빈(河濱)으로 돌아가 강위에 노닐며 세상일을 잊고 지낸 지가 5년이었다.(중략) 공이 관직을 맡아 백성을 잘 보살폈는데, 과거에 급제를 한 지 30년에 벼슬이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 공은 평생 명예와 형세를 피하였고 구차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서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떠나가 시골에 탁락(拓落)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름이 드날려지지는 않았으나 행실은 더욱 완전하였다.”라고 썼다.


둘째 다포(茶圃) 지화(之華 )는 형 지영과 함께 서사원에게서 수학했다. 광해군때 증광문과에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인조 반정 이후 호조정랑 군수 목사를 거쳐 병의 참의에 이르렀다. 정묘재란 때에는 의병장 여헌 장현광의 막하에 들어가 군량미 조달에 힘썼고 병자호란때는 호소사의 종사관으로 의병을 지휘했다.

하목정 뒤에 있는 사당은 지영의 증손인 전양군 익필을 제향하는 곳이다. 무인이었던 익필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토벌에 나서 분무 3등공신이 됐다. 나라에서 불천위로 정했다. 사당에 영정을 모시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사당 앞 뜰에는 400년 된 목백일홍 5그루가 있는데 여름에 장관을 이룬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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