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씨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은상

주인보다 늠름한 지팡이가 초인종 없는 대문을 대신 두드린다. 여든 중반인 친정아버지 친구 분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느닷없는 의식불명으로 일주일가량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게다. 관절염 환자인 엄마에게,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의 간병은 무리였다. 그래서 환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잠시 동안 친정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던 터였다.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 달려 나가 대문을 열어 드렸다. 녹슨 대문은 엄마 무릎을 닮았는지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삐걱, 그 여운의 말미쯤에 할아버지, 할머니 대여섯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신다. 당장 병원 신세를 지지는 않고 있을 뿐, 병문안이라면 가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익숙한 분들이다. 그 어려운 행차가 그저 감사했다.

안으로 모신 후 뒤를 따랐다. 근데 신기한 것이 어르신들 중 꼿꼿한 허리를 가진 분이 한 분도 안 계신다는 사실이다. 딛고 있는 땅을 기준 한다면 절을 하듯 앞으로 굽은 예각이 넷, 먼 하늘을 보듯 뒤로 휜 둔각이 둘이다. 수직은 찾아볼 수 없다. 맞으러 나온 엄마까지 보태면 수직에서 모자라거나 넘치는 일곱의 허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으로 들어간다. 허리 굽은 늙은 농부를 본 것이 처음도 아니요, 나이 들면 굽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바 아니건만 각기 다른 자세를 가진 어르신들을 뒤좇다 보니 그 풍경이 참 생경스럽다.

사람은 누구나 땅을 지탱하며 산다. 땅에 두 발을 딛고 머무르고 나아가고 또 달려간다. 하지만 다양한 직업군 중에서 농부만큼 땅과 가까운 존재가 있을까? 농부는 땅의 심기를 살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게 돌보고, 땅은 또 자연의 순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농부의 땀에 대답한다. 둘은 오랜 시간 서로에 의지해 살아왔다.

그렇게 평생을 사셨으면 막역하다 못해 제 몸 같아진 땅을 이제는 두 발로 단단히 밟고 꼿꼿이 설 수도 있으련만 죄인처럼 허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든다. 왜일까? 땅의 잉태와 생산을 돕느라 평생 굽힌 허리가, 용불용설用不用說, 땅의 조력자에 걸맞게 퇴화한 걸까?

앞으로 굽어 땅을 바라보는 네 분의 예각과 달리 할머니 두 분은 하늘을 쳐다보는 둔각이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늘의 도움을 바라 일 년 삼백예순날 올려다본 탓에 그렇게 굳어 버린 걸까? 어쩌면 한눈 팔지 않고 땅과 하늘만 바라보고 산 그들에게, 꼿꼿한 수직의 허리는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수직을 갖지 못한 일곱의 허리들이 안타까워 속으로 궤변을 늘어놓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음료수 박스를 건네신다. 무거웠던지 한쪽 어깨가 시소처럼 기울어 있다. 이제 빈손이라 홀가분해졌을 텐데도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어깨가 눈에 밟힌다. 음료수 박스의 무게 때문이려나. 아니 어쩌면 이십대 때부터 짊어져 온, 벗어던질 수도 남에게 떠넘길 수도 없는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이지는 않을는지.

아버지는 급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고 독한 진정제 주사에다 갖은 종류의 약 탓에 아직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진 못한 상태다. 제 마음대로 날뛰는 뒤틀린 마음을 감추려는지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계신다. 의사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논농사, 과수 농사, 온갖 밭농사,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버섯 재배까지 한 아버지는 땅의 안색을 살피고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평생 허리를 굽혔으리라. 그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허리는 도로 반듯해질 수 있으려나.

우리는 본성적으로 반듯한 걸 좋아하나 보다. 거울이나 액자가 조금이라도 삐딱해지면 바로 잡고, 사람의 자세 또한 반듯해야 좋아 보인다. 이런 ‘반듯함’에 대한 본성은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사람 참 반듯해서 좋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치 기준의 잣대로도 쓰인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반듯하지 못한 각도들이 외려 혼란스럽다. 편법을 모르고 하늘과 땅에만 기대어 수직의 삶을 살아 내고도, 늙어서는 수직의 자세를 갖지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아버지와 더불어 병세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위로를 건네겠다는 기대가 무너져서일까. 아니면 주인공 대신 열연한 엄마의 공연이 만족스럽지 못해서였을까. 친구 분들은 착잡한 얼굴을 하며 금세 가겠다고 하신다. 한 손으론 방바닥을, 다른 한 손으론 무릎을 짚고 겨우 일어선다.

어르신들을 뒤따랐다. 그런데 가던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더니 웃자란 마당의 풀들을 보고는 언성마저 높이신다. 한시도 그냥 둘 수 없다는 듯 집에 남은 약을 당장 갖다 주겠노라 잰걸음을 재촉하신다. 그러고 보니 급작스런 아버지의 발병에 눈 돌릴 틈 없었던 풀이 점령군처럼 마당 가득 수북하다. 왜 아버지 병세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그제야 어르신들 눈에 풀들이 보였을까? 자리 보존하고 누운 주인을 나 몰라라 하고 기세 등등 자란 풀이 미워서 인지, 아니면 당신들의 굽은 몸과 달리 위로 쭉쭉 뻗은 풀이 부러워서 인지 여쭤 보진 않았다.

배웅하고 마루에 앉아 갑작스런 성토를 받아 놀란 풀들을 본다. ‘반듯함’과 ‘기움’,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뒤엉킨다. 머리도 식힐 겸 흔들리는 시선을 고정하려 먼 산에 매단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는데 마당 한가운데 기우뚱한 자세로 빨랫줄을 받치고 있는 바지랑대가 눈에 들어온다. 수직의 몸을 갖고도 비스듬한 자세로 빨랫줄을 받치고 있다. 엄마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바지랑대가 오늘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있노라니 기울어져서야 유명해진 피사의 사탑이 떠오른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그 어떤 고층 빌딩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탑. 생각은 꼬리를 물어 목포 유달산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까지 이른다. 장군의 기개를 닮은 동상은 희한하게도 조금 기울어져 있다. 침략하는 왜적을 단칼에 베어 버리기 위해 곧바로 칼을 뽑으려는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 반듯하지 않은 기울기가 오래 뇌리에 남는다.

이쯤 되니 어르신들의 굽은 허리에 대한 생각이 슬슬 바뀌기 시작한다. 정직하게 산 삶을 보상받지 못한 듯해 안타깝고 보기 싫었던 그 각도가, 이젠 당신 한 분 한 분의 삶이 오롯이 담긴 자신만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보인다.

지구의 자전축은 약 23.5도 기울어져 있다. 만약 수직인 채로 자전을 한다면 기상의 변화와 물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계절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살기에 가혹한 땅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고 신기한 것은 지구에 가장 적합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기울기 덕분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별, 지구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모양 다른 삶의 궤적이 만들어 낸 어르신들의 기울기도 지구 자전축의 그것처럼 당신 몸에 가장 알맞게 맞춤한 각도이지 않을까? 어쩌면 이 별에 사는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기울기를 가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어지러웠던 머리가 맑아진다. 아직도 아버지는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계신다. 꿈속에서 친구 분들의 병문안을 받으셨는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다. 반달만큼 벌어진 입에 침이 흐른다. 침을 닦으려니 눈을 뜨신다. 일어서고 싶으신가 보다. 일어서려면 반듯했던 허리를 굽혀야 한다. 헝클어진 마음이 수직으로 돌아오려 하자 다시 굽어지는 허리. 반듯한 마음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예각의 허리로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 박지영

약력 

·경주 출생

수상소감

“글쓰기 역시 ‘열심히’보다 ‘재밌게’ 하겠습니다”

뜻있는 문학공모전을 개최해주신 경북일보사 및 문학대전 운영진 그리고 부족한 작품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갑작스런 발병으로 반듯이 누워 병상생활을 하신 친정아버지는 친구 분들의 병문안 덕분인지 그리 오래지 않아 건강을 회복하셨고 구부정한 허리를 되찾으셨습니다. 아버지의 굽은 허리는 농사뿐만 아니라 곤히 자는 자식들을 허리 숙여 보느라, 그렇게 밤낮을 돌보느라 더 굽어진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제가 허리 숙여 제 자식과 부모님을 돌볼 만큼 세월이 흘렀네요. 

‘열심히’보다 ‘재밌게’를 제 나름의 개똥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글쓰기 역시 ‘열심히’보다 ‘재밌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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