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곤씨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동상

나의 하루는 터널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고속도로에는 터널이 많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험준한 산세를 에돌지 않고 이토록 쉽고 명쾌하게 관통할 때마다 우리의 생이 이러했으면 하는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나 생의 터널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도 가도 출구가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있다. 터널을 지나면 다시 새 터널이 기다린다. 어떤 날은 터널 속조차 무너져 홀로 고립되어 우울한 기분일 때도 있다.

전국을 다니다가 무척산터널 근방을 지날 때면 불현듯 목석 같았던 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무척산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중학생 시절부터 나무를 깎고 다듬는 일만 천직으로 해오셨다. 목재소에는 어떠한 속이 뒤틀린 야생 원목이 와도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환골탈태하여 트럭에 몸을 싣고 새 삶을 향해 떠났다. 잔가지와 톱밥들은 누군가의 온기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옹이처럼 굴곡진 사연들이 너무 많아서, 끝났다 싶으면 다시 빈 트럭 같은 얼굴로 새로운 터널을 지나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셨다. 믿었던 거래처로부터 받았던 수표가 자주 부도를 맞았고 결재를 미루기만 하던 업체가 몰래 도망가버리는 상습적인 피해도 많았다. 집을 얼마나 자주 옮겨 다녔던지 주민등록 등본에는 집 주소가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나무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짐승이나 곤충이나 새들조차도 새끼를 양육하고 생존하는 일로 사력을 다해 나무터널을 뚫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인정사정없는 톱날에 두 번째 손가락을 내어주고 말았다. 통증이 사라진 텅 빈 부위는 벌거벗은 터널과도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지니고 다니던 터널을 자세하게 지나가 본적이 없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인 탓에 조금 긴 대화를 하기란 어색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각자가 서로 다른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나무 깎는 일을 돕다가 종종 울상을 짓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과 까끌까끌한 톱밥에 뒤덮이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나는 무심하게도 아버지가 목재소 문을 닫고 일선에서 물러나서야 아버지의 귀가 많이 어두워져 있고 폐가 약해져 있음을 알았다. 평생의 시간들을 기계들이 쏟아내는 소음과 먼지, 그리고 톱밥으로 가족 생계를 이끈 탓이었다. 나뭇가지를 쳐내듯 폐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다.

은퇴한 이후부터의 아버지는 갑자기 스스로가 고목이 된 듯 너무 적막해졌을 것이다. 그동안 느티나무처럼 쉬지 않고 물과 양분을 공급해왔으나 뒤늦게 되돌아보니, 제 몸이 깎이고 구멍난 상태로 석양처럼 저물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막막했을 것이다. 어쩌면 한 몸 같았던 존재의 상실감으로 두려웠거나 사람 소리가 더욱 그리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멀리 살고 있다는 명분으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나무는 언제나 누군가를 응시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서 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새처럼 나타나면, 아버지는 여전히 “왔나.”라며 눈길 한번 주고는 안방에 들어가서 뒷모습만 보이셨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내가 올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고 오라고 등을 떠밀곤 했다. 인근의 보신탕집에서 단 둘만의 식사를 몇 차례 하면서 그제서야 아버지의 텅 빈 손가락 부위를 자세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비록 말없는 식사였지만 점점 불편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침묵의 언어가 조금씩 내 마음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오늘을 못 넘길 것이라는 연락이 도착했다. 천안에서 시동을 켜고 김해로 출발했다. 아무 말 없는 터널들을 빠르게 지나 병원에 도착했다. 병동에 들어서니 하얀 침대에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한 그루의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숙연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아버지, 저 왔어요.” 하니,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심장박동 수치가 가파르게 솟구쳤다. 이이 아버지의 언어였음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나를 목숨처럼 간신히 기다리신 듯했다.

보름 전에 뵙고 나서 다시 병실을 떠나려고 했을 때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초승달 같은 눈썹을 으깨며 부르르 녹아내리던 느티나무 고목의 눈물을 보았던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야 한다는 건 진실로 가슴 찢기는 일 아닌가.

곁에 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몇 시간 전에 의식을 잠깐 회복했었다고 했다. 최근 한 달 동안은 반쯤 치매 상태였던 탓에 어머니를 보고도 “간호사가 바뀌었나?”고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기어이 온전한 정신을 끌어당겨, “이사 잘했나?”라는 질문이 전부였다니 역시 아버지다운 언어였다. 뒷모습이라는 제자리가 익숙했던 아버지였지만, 주파수는 항상 자식에게로 맞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아들이 넓고 쾌적한 새 집으로 잘 이사했다는 대답이 이불처럼 포근하셨는지 더 이상 의식이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은 이 질문이 마지막 유언이었다. 내게는 ‘이사 잘했나’라는 말씀이 ‘잘 먹고 잘살아가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다.

몇 시간 후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터널을 지나셨다. 말없이 톱밥 화르르 쏟으며 항아리 속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 후로부터 해마다 명절이면 아버지는 무척산에 있는 공원묘원에서 우리를 맞이하신다.

우리는 세계 안에 던져진 채 살아가는 존재, 즉 ‘피투성’이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 낯선 세상에 던져지자마자 원치 않게 자주 피투성이로 살아가게 된다. 보이지 않으나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어떤 힘이 우리더러 속도전을 부추기고 있다. 서로 먼저 터널을 뚫고 지나가려고 아우성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과녁이 되고 있다. 견디지 못해 세상을 통째로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도 터널 같은 세상에 던져진 나는 미소를 가득 충전하고 출발한다. 톱밥 먼지 속에서도 항상 미소를 짓던 아버지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많이 닮아 있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겪으셨을 것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피투성이가 되는 삶 아닌가. 나는 무척산에 계시는 아버지와 지금도 미소로 소통하고 있다. 어쩌다 긴 터널을 만나게 되면 무척 그리워지곤 한다.


▲ 김영곤씨
약력

· 월간문학 수필 「갈대」 등단.

· 한국문인협회 및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원.

· 매직어린왕자 대표 : (마술사 및 인형극 공연가)

수상소감

“좁고 어두운 터널 지날 때마다 영혼은 더 넓어질 것”

당신을 보니 어느덧 가을이 왔음을 깨닫습니다.

당선 소식 문자가, 단풍잎 만한 창문에 바싹 붙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황금빛이 내 마음에 수북 쌓였지요. 이것은 분명 당신이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예전의 그때처럼 격렬하게 말 없는 모습으로… 마치 나무처럼.

점점 마음의 무게가 늘어가면서 나무만 보면 오래 머물게 됩니다. 특히 벌레들이 뚫어놓은 구멍이나 부러진 가지, 그리고 고독해 보이는 옹이를 지나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는 해인사로 들어서는 내내 수없이 눈에 밟히는 고목들을 보며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남겨두고 자주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쉬는 날만 되면 홀린 듯 도서관으로 가서 책과 데이트를 합니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문학은 결코 만만하지 않는 고독한 발걸음이라는 것이 점점 마음에 밟혀집니다. 특히 가족들의 이해와 배려 없이 무작정 혼자서만 걸을 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홀로 있는 건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홀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터널에서 자주 홀로 있습니다.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내 영혼이 더 넓어지고 헹궈지는 것을 예감합니다.

‘터널’에 단풍빛을 밝혀주신 심사위원님, 더욱 뿌리 깊어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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