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번을 읽고 또 읽고···아둔함을 넘어선 노력 마침내 인정받다
조선 선비 중에서 대표적으로 노둔한 이가 김득신이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노둔’을 입력하면 김득신과 관련된 기사가 도배를 한다. 노둔과 김득신은 같은 의미로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득신은 김치와 목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치는 20살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예조참의 대사성 동부승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외숙인 묵서흠과 목장흠 목대흠은 당대에 이름난 문인이었다. 그의 조부 김시민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으로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20,000여 왜군을 격퇴하고 전사했다.
김득신은 이렇듯 명문가의 자손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했다. 10살이 돼서야 공부를 시작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십구사략 十九史略’ 첫 번째 장 26자를 익히지 못해 입을 떼지 못했다. 실망한 외숙 목서흠이 아예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다. 39살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그해 가을 정시에 낙방했다. 고향인 목천현(현재의 천안시)로 돌아와 막역지우인 박장원 정두경과 어울려 시와 술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달랬다.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가을 산에 소낙비 들이 치네
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김득신의 시 ‘용호’
김득신은 종종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모양이다. 말은 간혹 자신을 찌르는 비수이기도 하다. 친구 박장원이 네 번이나 편지를 써 입을 다물라고 주의를 주었다. ‘취묵’은 박장원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아 들여 지은 당호다. 술에 취해서도 입을 다물겠다는 뜻이다. 그 내막을 자신이 쓴 ‘취묵당기’에 자세히 적었다. “대개 술에 취해서도 입을 다물겠다는 뜻을 잊지 않으련다. 취해서도 입을 다물고 깨어나서도 침묵하며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 몸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면 이는 박중구(박장원의 자)가 내려준 은혜일 것이다. 어찌 나를 경계한 뜻을 저버릴 수 있는가”
11만3천 번 읽은 ‘백이전’은 그가 얼마나 노둔한 지를 입증하는 사례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하인과 길을 가는데 근처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숙한 데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인이 말했다. “이것은 공께서 평생토록 읽으신 백이전인데 그걸 모르십니까” 김득신의 글 읽는 소리를 늘 들어온 하인도 알고 있는데 정작 그는 기억을 못했던 것이다. 웃지 못한 일화는 또 있다. 한식날 하인과 길을 가던 중이었다. 그의 머리에 기가 막힌 시상이 떠올랐다.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라고 읊어놓고 나니 대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하인이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 하였네)’라고 대구 했다. 김득신이 놀라 말했다. “너의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내가 네 말 시중을 들겠다” 그러자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 날마다 읽던 바로 그 당나라 시 아닙니까” 김득신은 당나라 시인 송지문의 ‘도중한식’을 애송했고 얼마나 많이 외웠으며 하인도 귀동냥으로 당시를 줄줄 외었다. 그걸 자기가 창작한 시어 인줄 착각했던 것이다.
궁벽한 괴산에서의 고단한 삶
어찌해야 적막함을 떠나 보낼까
어부들은 강 시장에 모여들고
봄날 화전불은 돌밭을 태우네
소나기는 푸른 들판에 쏟아지는데
뭉게구름은 파란 하늘에 뻗쳐있네
오늘 아침에 푸석했던 얼굴이
술마시고 홍조를 띠었네
-김득신의 시 ‘취묵당’
김득신은 81세가 되던 1684년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설이 여럿이다. ‘행장초’는 설사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약을 먹고 차도가 있었는데 허벅지에 생긴 종기가 터져 죽었다고 썼고 ‘숙종실록’은 명화적에게 피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백곡집’은 개에게 물려 죽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