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번을 읽고 또 읽고···아둔함을 넘어선 노력 마침내 인정받다

취묵당은 괴강 강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취묵당은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지은 정자다. 김득신을 찾아 가는 길에 ‘노둔(魯鈍)하다’라는 낯선 단어를 만났다. 사전적 의미는 ‘둔하고 어리석으며 미련하다’이다. 대개 지능지수가 떨어져 암기력은 물론 이해력도 떨어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노둔한 인물은 공자의 제자 증삼이다. 공자가 그의 수제자 10명의 특징을 요약하면서 “덕행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정사에는 염유 자로가, 언어에는 재아 자공,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뛰어났다”고 말한 끝에 “증삼은 노둔했다”라고 혹평했다. 증삼은 공자의 혹평을 받았으나 특유의 성실함으로 학문을 닦아 공자의 도의 진수를 얻어 마침내 ‘증자’로 추앙 받았다.


조선 선비 중에서 대표적으로 노둔한 이가 김득신이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노둔’을 입력하면 김득신과 관련된 기사가 도배를 한다. 노둔과 김득신은 같은 의미로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득신은 김치와 목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치는 20살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예조참의 대사성 동부승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외숙인 묵서흠과 목장흠 목대흠은 당대에 이름난 문인이었다. 그의 조부 김시민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으로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20,000여 왜군을 격퇴하고 전사했다.


김득신은 이렇듯 명문가의 자손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했다. 10살이 돼서야 공부를 시작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십구사략 十九史略’ 첫 번째 장 26자를 익히지 못해 입을 떼지 못했다. 실망한 외숙 목서흠이 아예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다. 39살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그해 가을 정시에 낙방했다. 고향인 목천현(현재의 천안시)로 돌아와 막역지우인 박장원 정두경과 어울려 시와 술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달랬다.

팔작지붕에 목조 기와집으로 내면은 통간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운도 겹쳤다.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으나 시를 잘 써 시명이 높았다. 택당 이식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진사에 합격했을 때는 선비들이 그의 시를 베껴가며 감상했다. 1644년 백의의 신분이었지만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제술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 해에 명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장도에 오르지도 못했다. 첫 벼슬이 이렇듯 허망하게 끝났다. 이듬해 음서로 숙녕전 참봉에 임명됐으나 죽은 왕후의 신위를 지키는 참봉일이 고달프기만 했다. 사직하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김득신이 시로 이름을 날리고도 벼슬을 못하자 사람들은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한다는 뜻으로 ‘시능궁인(詩能窮人)이라 불렀다. 나이 59살에 마침내 문과에 합격했다. 성균관 학유를 시작으로 승문원 병조 공조 예조에서 일하다 홍천 현감, 정선 군수 등의 외직을 맡았지만 벼슬살이도 괴로웠다. 괴산으로 내려왔다.

취묵정에서 본 괴강
취묵당 앞을 흐르는 괴강
취묵정은 김득신이 59살에 문과에 합격하던 1662년에 지었다. 괴강이 활처럼 굽어 흐르는 괴산읍 능촌리 강 언덕,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취묵당은 민가도 없는 한적한 곳이다. 네비게이션도 찾지 못해 차선이 하나 밖에 없는 콘크리트 농로를 한참 돌아다녔다. 취묵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김득신의 조부인 김시민을 배향하는 충민사가 있는데 이 일대가 그의 집안 전장이 있던 곳인 모양이다. 정자는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안쪽에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괴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김득신이 정자를 지을 당시에는 고깃배들이 들락거리고 어시장이 서는 풍경도 발아래 펼쳐졌다고 한다. 정자 안에는 취묵당 중수기 취묵당기 독수기 등의 현판이 빼곡히 걸려 있는데 취묵당 편액도, 그가 억만재라고 지은 편액도 없다. 정면 네 개의 기둥에 김득신의 대표작인 ‘용호(龍湖)’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용호’는 효종이 “이 시는 당나라의 시 속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가을 산에 소낙비 들이 치네
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김득신의 시 ‘용호’


▲ 취묵당에 걸려 있는 김득신의 주련시 ‘용호’의 한 구절

김득신은 종종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모양이다. 말은 간혹 자신을 찌르는 비수이기도 하다. 친구 박장원이 네 번이나 편지를 써 입을 다물라고 주의를 주었다. ‘취묵’은 박장원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아 들여 지은 당호다. 술에 취해서도 입을 다물겠다는 뜻이다. 그 내막을 자신이 쓴 ‘취묵당기’에 자세히 적었다. “대개 술에 취해서도 입을 다물겠다는 뜻을 잊지 않으련다. 취해서도 입을 다물고 깨어나서도 침묵하며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 몸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면 이는 박중구(박장원의 자)가 내려준 은혜일 것이다. 어찌 나를 경계한 뜻을 저버릴 수 있는가”

취묵당은 백곡 김득신이 만년을 보낸 독서재다. 억만재라고도 한다.
취묵당에서 그는 행복했다.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는 정자에 걸려 있는 ‘독수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독수기는 34세 때부터 67세 때까지 34년간 읽은 고문의 횟수와 목록이다. 1만 번 이상 읽은 책 36편의 문장을 나열하고 각 편의 읽은 횟수와 읽은 이유를 밝혔다. 이 가운데 ‘사기-백이전’은 1억3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의 1억은 10만을 가리키므로 실제로 읽은 횟수는 11만3천 번이었던 셈이다. 김득신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취묵당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불렀다. 정약용은 김득신의 독서횟수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김백곡독서변’에서 “백이전을 하루 백번 읽으면 1년에 36,000번, 3년에 10만8,000번 읽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을 전폐하고 읽을 수 없으므로 4년은 걸리며 나머지 글을 읽은 횟수를 합치면 모두 51만7,000번이므로 순수하게 20년이 걸린다”며 김득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11만3천 번 읽은 ‘백이전’은 그가 얼마나 노둔한 지를 입증하는 사례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하인과 길을 가는데 근처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숙한 데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인이 말했다. “이것은 공께서 평생토록 읽으신 백이전인데 그걸 모르십니까” 김득신의 글 읽는 소리를 늘 들어온 하인도 알고 있는데 정작 그는 기억을 못했던 것이다. 웃지 못한 일화는 또 있다. 한식날 하인과 길을 가던 중이었다. 그의 머리에 기가 막힌 시상이 떠올랐다.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라고 읊어놓고 나니 대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하인이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 하였네)’라고 대구 했다. 김득신이 놀라 말했다. “너의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내가 네 말 시중을 들겠다” 그러자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 날마다 읽던 바로 그 당나라 시 아닙니까” 김득신은 당나라 시인 송지문의 ‘도중한식’을 애송했고 얼마나 많이 외웠으며 하인도 귀동냥으로 당시를 줄줄 외었다. 그걸 자기가 창작한 시어 인줄 착각했던 것이다.

김득신이 자신이 읽은 책의 횟수와 이유를 쓴 독수기 현판
그는 취묵당에 앉아 주변 경관을 8경시로 노래했다. ‘옹암에서 보는 꽃( 甕巖看花)’ ‘불암의 눈 감상(佛巖賞雪)’ ‘강어귀의 장삿배(江口商船)’ ‘나룻머리의 고기잡이 불빛(渡頭漁火)’ ‘들판 다리를 건너가는 행인(野橋行人) ’모래사장에서 놀라 날아가는 기러기(浦沙驚雁)‘우협의 아침 아지랑이(牛峽朝嵐)’ ‘용추의 저녁비(龍湫暮雨)’등이다.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궁벽한 괴산에서의 고단한 삶
어찌해야 적막함을 떠나 보낼까
어부들은 강 시장에 모여들고
봄날 화전불은 돌밭을 태우네
소나기는 푸른 들판에 쏟아지는데
뭉게구름은 파란 하늘에 뻗쳐있네
오늘 아침에 푸석했던 얼굴이
술마시고 홍조를 띠었네
-김득신의 시 ‘취묵당’


김득신은 81세가 되던 1684년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설이 여럿이다. ‘행장초’는 설사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약을 먹고 차도가 있었는데 허벅지에 생긴 종기가 터져 죽었다고 썼고 ‘숙종실록’은 명화적에게 피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백곡집’은 개에게 물려 죽었다고 전한다.
김동완 여행작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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