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광로 보다 더 뜨거웠던 포항 유치전
행운의 ‘777(1967년 7월7일)’ 확정

▲ 1967년 7월 22일 포항 시내 전역에 걸쳐 시가행진과 환영대회 형태의 ‘종합제철공장 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초 종합제철공장 후보입지로 거론되지도 못했던 포항이 막판에 기적적인 선정이 공식발표된 것은 1967년 7월 7일. 포항으로서는 행운의 숫자 7이 3개나 겹치는 날 큰 경사였으나 함께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였던 많은 도시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만큼 전력투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1967년 대선과 총선까지 치러져 나라 안팎에 한바탕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는데 종합제철 유치전이 그 태풍의 핵이 되었다.

1967년 연초부터 국민은 종합제철 입지에 대해 초미의 관심을 나타냈다.

정부가 돈줄을 쥐고 있는 KISA(대한 국제제철차관단)와 협의를 거쳐 4월 6일, 18곳의 후보지 가운데 포항, 영일, 삼천포, 울산, 보성 등 5곳으로 압축하자 그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대한 뉴스에 보도된 시민환영대회 모습
특히 건국 이래 최대 대역사인 종합제철이 자기 지역에 유치되었을 경우 공업도시로써 눈부신 지역발전이 이뤄진다는 기대로 5개 지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영토확장 전쟁보다 더 치열한 유치전을 폈다. 

정치권의 줄 대기 유치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마침 6대 대통령선거와 7대 국회의원 선거의 막바지여서 선거 이슈의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경북도와 충청남도는 도민들에게 연판장을 돌려 각각 30만 명과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으며 신민당과 공화당 후보들은 각 선거구 마다 자신이 종합제철을 유치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공약을 쏟아냈다. 전남 보성에서는 공화당 총선후보가 시가지 중심에 제철공장 유치를 공약하는 아치 탑을 곳곳에 세워 선거에 활용하기도 했다.

정부와 입지선정평가단은 5월 11일부터 6월 10일까지 5개로 압축된 후보지를 대상으로 현지답사를 통한 ‘종합제철 입지선정비교조사’를 통해 장래소요시설, 투자비, 유지관리비 등 모두 12개 항목으로 평가를 해 결국 포항이 1위, 전남 보성 2위, 삼천포 3위의 성적표를 발표했다.

대한뉴스 환영대회 공설운동장
형산교 가설 준공식.
△지역 유치운동


5개 후보지 가운데 포항과 영일 두 곳이 포함되자 지역에서는 포항상공회의소 등 상공인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유치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시군통합 이전이어서 포항과 영일 두 곳을 모두 염두에 두고 추진기구를 발족했지만 경북도 등 관공서에서는 주변 시설이 미약한 포항지구 보다는 강원도와 인접하고 항만이 조성된 영일 월포리에 힘을 싣는 분위기였다.

‘포항상공회의소 70년사’의 기록에는 종합제철건설에 따른 정부 기본방침이 발표되고 경제기획원에서 후보지가 거론되면서부터 전국에서 가장 먼저 유치운동 조직적으로 나선 곳이 바로 ‘포항’이다.

그때만 해도 의회가 없었고 민간차원의 대대적인 유치운동을 위해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경제단체인 상공인중심의 포항상공회의소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실무 사무 요원 지원과 비용을 감안 했을 때 상공회의소 말고는 대안도 없었다.1967년 2월 3일 포항과 영일지구에 종합제철 유치를 위한 ‘동해지구개발협회’가 결성된다.

동해지구개발협회의 회장은 당시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인 오실광씨가 맡았으며 부회장은 영일 쪽에서 이정기, 이달환씨 포항 쪽에서는 정명방우, 김경섭씨 등 영일과 포항 양측의 지분을 안배한 4명으로 구성됐다.

추진기구가 결성되자마자 종합제철 유치운동이 본격화 됐다. 사무실을 상공회의소에 둔 개발협회는 당장 2월 4일 청와대 등 관계요로에 건의서부터 보냈다. 이후 2월부터 정부의 최종용역이 발주되던 5월까지 4개월간 오실광회장은 물론 총무를 관장하던 포항시장 출신의 박일천씨 등 실무진은 13차례나 서울을 오르내리며 관계장관과 관련 부처와 접촉했다.

국내 철강수요가 70년대에는 연간 300만 t에 이를 것이라는 내용의 대통령 비서실의 보고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수요예측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촬영=한국역사박물관에서 이한웅)
당시만 해도 후보군으로 부상하던 다른 지역에 비해 포항과 영일의 경우 막강한 힘(빽)을 행사할 정치, 사회적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일이 유일한 유치전략이었다.

협회는 1967년 2월 11일 포항과 영일은 물론 인근 경주와 영덕을 두루 찾아다니며 50만 명이 서명한 연판장을 받아냈고 3월 23일에는 100만 경북도민의 연판장을 받아 정부에 보내는 속도전을 펼쳤다.이 같은 끈질긴 노력 때문인지 관련 부처 장관으로부터 10차례 답신이 왔으며 3월 5일에는 건설부 장관 일행이, 6월 28일에는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가 영일 월포리를 방문했다. 정 총리의 방문 시점은 용역기관의 최종보고서가 정부에 제출되는 때여서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 결국 열흘 후 포항으로 최종낙점 발표가 난 것을 보면 당시 제철소입지에 대한 보안이 철통 같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고생 시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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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포항시가지
△1967년 7월 22일-종합제철공장 환영대회

종합제철 입지가 7월 7일 발표되고 불과 보름 만에 포항에서는 범시민 환영대회가 열린다.

유치추진기구였던 ‘동해지구개발협회’ 주최로 열린 범 시민환영대회는 7월 22일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시내 전역에서 시가행진과 시민집결 등으로 다채롭게 열렸으며 준비위원회 조직도 방대했고 환영대회 내용도 축제 분위기였다.

공설운동장을 중심으로 열린 환영대회는 오전 9시 포항시청을 출발하는 시가행진을 시작으로 저녁 6시 포항시 시공관(지금의 중앙아트홀)에서 개최된 방송국의 노래자랑대회로 막을 내렸다.

▲ 유치확정 기사
시내 주요 도로를 따라 행진하는 가두행렬은 농악대를 앞세우고 각 읍면동과 시내 모든 학교 단위로 조직적으로 참여했는데 시청을 출발해 중앙통 도로를 따라 행사장인 공설운동장으로 행진해 운동장에서 유치대회 집회를 갖고 다시 포항역과 우체국을 지나 시청 앞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 시가행진은 심사위원까지 두고 규모와 독창성 등을 심사해 포상과 푸짐한 상품을 주었으며 이 거창한 축하행사는 대한뉴스를 통해 전국 극장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이날 환영대회의 대회장은 포항상의회장인 오실광씨가 맡았고 김인 경북도지사가 명예 대회장에 추대됐다.

역할별로 박일천씨 중심의 총무부와 강신우씨 등 40여 명의 안내부, 김재학씨 등 25명의 재정부 포항과 영일군 건설과 공무원 중심의 시설부 또 이명석씨 등이 주도하는 선전부, 도립병원장을 포함한 의무부와 시군청공무원과 경찰서가 포함된 동원부에 이르기까지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행사준비도 치밀했다.

▲ 경북도가 영일군 청하면 월포리를 제철소후보로 추천하며 도민 서명을 받아 추진한 내용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경북도는 포항보다 ‘영일 월포’를 적극 추천

경상북도는 당초 포항지구보다는 영일군 월포리가 종합제철소 입지로 타당하다고 판단, 집중적으로 월포리를 밀었다.

당시 김인 경상북도지사는 1967년 1월 대통령 연두순시 때도 포항에서 20Km 떨어진 영일군 청하면 월포리가 종합제철소 후보지로 가장 적합하다고 건의했다. 경북도는 월포리의 경우 10만t급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고 국내 철광석매장량의 90%가 있는 강원도와 가깝다는 점을 부각 시켰다.

도민 30만 명의 서명을 받은 종합제철공장 유치건의서에도 '월포리'를 제철공장 입지로 못 박아 지역주민의 서명을 받아 도지사가 3월 말에 상경해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 이한웅 논픽선·탐사기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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