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이 나라 구할 옥대·만파식적 얻기 위해 걸었던 호국의 길

기림사 가는 길
길은 삶의 은유이자 문명이 흐르는 강이다. 도시는 길의 접점에서 형성되고 길과 길로 연결된다.

길은 위락과 힐링의 공간이다. 길을 걸으면서 문화와 인간 삶의 흔적들을 확인할 뿐 아니라 위안과 건강을 얻는다. 경북일보는 지난해 동해안의 바닷길인 해파랑길을 2명의 여류작가가 걸으면서 소개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기획의 연장선 상에서 ‘경북의 길을 걷다’를 연재한다.

현대인들의 걷기 열풍은 ‘올레길’ ‘둘레길’을 만들어냈다. 오랜 세월 자연의 품속에 숨어 있다가 새롭게 단장돼 속살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길들이 경북에 즐비하다. 사람들은 건강과 여행, 트레킹 등 다양한 이유로 그 길들을 찾아 집을 나선다. 오리나무 숲길이 아늑한 경주 왕경에서 동해로 이어지는 ‘왕의 길’, 조선 시대 선비의 품격이 낙동강을 따라 흐르는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이어지는 ‘선비길’,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청송의 신성계곡을 따라 걷는 ‘녹색길’, 청정 자연이 이어지는 영양 봉화로 연결되는 ‘외씨버선길’ 등 너무나 아름다운 길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에 있어서 일체의 것이 다 길이다”라고 했듯이 길은 인간 역사의 온기가 전해지는 핏줄이다.

경북의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 경북 문화의 향기, 자연의 아름다움, 순박한 삶의 모습들을 만화경처럼 펼쳐 보이하려 한다.



계절 변화는 놀라운 자연의 축복이다. 걷기 좋은 계절이 왔다. 봄(春)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뿌리내려 버티는 삶에 대한 선물이자 신기루 같은 계절이다. ‘걷기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했다. 걷기 열풍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속도와 경쟁에 찌들었던 현대인들이 자연과 호흡하면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해주는 힘과 마음을 활짝 열 기회를 제공한다. 걷기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주는 인문학(人文學)적 매력을 갖고 있다.

기림사 전경.
△충효와 호국의 길

왕의 길, 어딘가 모르게 계급적인 냄새가 나고 값비싼 융단이라도 깔렸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골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고샅길이나 골목길이 정겹고 포근하게 느껴지지만 ‘왕의 길’은 왠지 권위적이고 화려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틀렸음을 알았다. 길모퉁이마다 숨은 얘기와 설화를 간직한 ‘왕이 지나간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길’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이 길을 걸었거나 걸어야 할 사람이라면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과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왕의 길은 편의상 네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경주시 내 월성에서 시작해 월지~능지탑~황복사지~명활산성~덕동호~추원마을~모차골~수릿재~세수방~용연폭포~기림사~골굴사~감은사지~이견대~문무왕릉까지 동해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세 번째 구간에 해당하는 추원마을에서 기림사까지 걷는 왕의 길은 ‘신문왕 호국 행차길’로 석탈해가 신라로 들어왔던 길이자 문무왕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 묘를 찾아가 나라를 구원할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충효와 호국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추원마을~모차골~수렛재~세수방~불령봉표~용연폭포~기림사까지 편도 약 6㎞ 거리다.

기림사 가는 길
△속 깊은 사람 같은 속 깊은 숲길

경주시내 월성에서 경주박물관 지나 7번국도 따라 울산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문무왕을 화장했다는 능지탑을 지나 낮은 길을 올라 선덕여왕릉 이정표를 지나면 보문 들녘이 나온다. 신문왕 아들 효소왕이 세웠다는 황복사지와 진평왕릉을 지나게 된다. 보문호수에 있는 명활산성과 보불삼거리에서 감포로 접어들면 덕동호가 눈에 잡힐 듯 들어온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오르다 추령재(楸嶺) 가기 전 왕의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난다. 경주시내에서 동해는 토함산(吐含山)으로 넘어가는 길과 추령재와 함월산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함월산(含月山·584m)은 달을 품고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왕의 길은 행차가 거창할 수밖에 없었기에 가파른 토함산과 추령재를 피해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고 넓게 조성된 함월산 쪽으로 길을 잡은 것 같다. 추령터널 못 미쳐 황룡약수터 방향으로 들어서면 추원마을이 나오고 모차골까지 약 2.4㎞로 시멘트와 포장길을 걸어야 한다. 황룡약수터 못 미처 주차장을 최근에 새로 조성해 놓았다. 모차골 입구에 도착하면 인자암과 신문왕 호국행차길 간판 옆에 수렛재 1.4㎞, 용연폭포 3.5㎞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모차골은 마차가 지나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마차길이 마찻골, 모차골로 불리었을 것이다.

신문왕 호국행차길 안내도
춘분 절기에 내린 봄눈을 밟으며 수렛재로 향했다. 죽은 듯 웅크린 나뭇가지 끝마다 도톰하게 살이 올랐다. 하얀 눈으로 가득한 숲 사이를 유유자적 걸으니 왕이 된 기분이다. 골짜기엔 물이 넘쳐났다. 계곡을 끼고 천천히 수렛재에 올랐다.

신문왕은 수렛재를 넘으며 덜컹거리는 수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681년 무렵 정국은 어지러웠다.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고,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준동도 늘 고민거리였다.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안정을 도모하기 삼국 통일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에게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682년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를 완성하고, 이듬해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대왕암을 찾기 위해 행차에 올랐다. 임금이 다녔던 길이기도 하지만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주요 방어선이었고 많은 군수품이 오갔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孝)와 나라를 위한 충(忠)의 얼이 깃든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숲에는 생강나무와 진달래가 철모르고 꽃을 피웠다.

불령봉표
△말구부리와 세수방, 불령봉표

수렛재를 넘으면 가파른 내리막길인 말구부리다. 비탈길에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구부러졌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왕의 행차는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깎아지른 듯한 길은 곧이어 세수방에 다다른다. 신문왕 일행이 쉬면서 손을 씻었던 개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에는 낙엽이 계곡을 덮어 물은 보이지 않지만, 물소리가 음악처럼 흐르기도 한다. 경주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고 사람이 살며 불을 땐 흔적과 화전을 일구었을 것으로 보이는 경작지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사태를 막기 위해 쌓은 석축들을 볼 수 있다.

눈 속에 핀 진달래
세수방을 지나 계곡을 서너 번 건너 완만한 오르막 고개에 불령봉표(佛嶺封標)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봉표는 조선 23대 임금 순조 31년 1831년 10월에 세웠다. 가로 1.2m, 세로 1.5m 크기의 화강석 표면에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순조의 아들 연경(효명세자 묘호)묘의 봉제사와 그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숯을 만드는 산이니 일반인이 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불령봉표 일대는 조선시대 고급 숯인 백탄(白炭) 생산지로 전해지고 있다. 백탄을 만들기 위해선 나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벌채를 막고자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불령표석 주변에 숯 가마터 흔적이 남아 있다. 소중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표석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보존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용연폭포
△만파식적과 용연폭포

불령봉표를 뒤로하고 기림사(祗林寺)로 발길을 옮긴다. 내리막길이다. 모차골에서 기림사까지 고즈넉한 숲길을 걷기에 움직임이 단조로울 수 있다. 하지만 용연폭포에 이르면 그런 풍경과 단조로움은 이내 사라진다. 기암괴석과 어울려 쏟아내는 물줄기는 말 그대로 용이 놀다가 하늘로 곧바로 차고 오른 듯한 장엄함이 있다.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동해의 해룡으로부터 얻어서 환궁할 때, 마중 나온 어린 태자가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생긴 연못을 용연(龍淵)이라 했고 그때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띤 폭포를 용연폭포라 불렀다고 한다. 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 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피리를 ‘거센 물결을 자게 하는 젓대‘인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불렀다. 그 당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가상의 세계를 통해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 폭포 주변에 멸종위기 2급 어류인 독종개가 서식하고 있다.

안내지도
용연폭포에서 기림사까지는 평온함으로 가득한 길이다. 기림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 승려 광유가 창건했고, 원효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삼천불전과 그 아래 대적광전 앞에 500년 된 반송이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기림사를 두루 둘러보고, 명부전 앞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 길을 따라 돌아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골굴사 지나 문무왕릉까지 갈 수 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연초록으로 가득한 길. 여름에는 나무그늘 기운이 넘치는 시원한 길.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곱게 물들어 역사의 현장을 걷는 듯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걷기 좋은 길이다. 경주 곳곳에 왕들이 걸었던 길 가운데 도심지에서 벗어나 있는 ‘신문왕 호국행차길’을 봄바람이 한껏 불어오는 가슴에 꽃 한 송이 마음에 달고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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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홍 시인

시인 윤석홍은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 내내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펼쳤으며 이전에 오지 여러 나라에 봉사를 겸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종주 등 국내 산은 물론 해외 여러 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윤 시인은 지난해 미국 네바다주 시에라산맥에 있는 존 뮤어 트레일을 종주하고 ‘존 뮤어 트레일을 걷다’ 책을 펴내기도 했다. 윤 시인은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 등 네 권의 시집을 펴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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