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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세상에 태어난 1962년부터 뒤를 보고도 손도 안 대고 그냥 나오는 편리한 화장실에 오기까지 30년은 눈부신 격동의 시기였다. 기억하는 유년부터 서른이 되기까지 고대의 물질문명부터 첨단의 물질문명을 다 경험한 것 같다.

‘통시와 처가집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상생활 공간의 한쪽 귀퉁이 어둡고 돌아앉은 곳에 있던 변소. 왜 그때는 한밤중에 그곳을 가야 했는지? 같이 가기 귀찮다는 누나를 억지로 붙잡고 변소에 갈 때면 ‘달걀귀신 이야기’가 실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누나, 어디 있어? 으, 여 있어. 빨리 보고 나와. 누나, 거 있어? 그래. 있어. 다 돼 가여? 누나. 누나. 계속해서 무서움을 달래려고 누나만 불러댔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 우리가 학교 갈 때쯤이면 곧잘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밭으로 가셨다. 밭에 거름을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인 줄 알았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변소가 차는 것을 보면서 ‘똥장군’이 단순한 거름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변소가 차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잿간에 똥을 퍼서 발효시키는 것도 모자라면 더 자주 차는 것 같은 변소. 그것을 들어내는 청소가 집안의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무렵 ‘삐용, 삐용’하는 ‘똥차’가 나타났고, 집집마다 ‘똥장군’은 사라졌다.

‘똥차’는 똥을 덕지덕지 붙인 채 일하는 사람들까지 똥을 묻혀 온 동네 냄새를 진동시켜 돌아다녔지만, 마을 사람들은 집안의 큰 걱정거리를 해소해 주는 것으로 감사했다.

일제 말엽 먹고살기 위해 일본으로 가셨던 숙부모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방문단’이 되어 1978년 우리 집에 오셨는데, 많은 보따리를 가져오셨다. 대부분이 헌 옷들이었는데, 그 속에는 숙부모님이 쓸 일용품으로 비누, 치약, 칫솔, 수건, 화장지, 면도기 등이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에 비해 포장이 세련됐고 향기가 좋았다. 그중에 화장지는 그나마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그것으로 숙부모님은 뒤를 보실 때 사용했는데, 우리는 그때에도 신문을 잘라 뒤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시골에도 지붕 개량을 넘어 ‘농가주택개량’ 사업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흙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새마을사업을 벌인 우리에게 새로운 주거 문명이 밀려왔다. 농가주택개량은 초가삼간을 허물고, 철근콘크리트에 슬래브 지붕이라는 형식을 너도나도 채택하게 했고, 그 안에 거실, 주방, 욕실, 화장실, 다용도실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구조들을 배치했다.

욕실 겸 화장실엔 냉온수가 나오게 했고, 집에서 몸 전체를 씻을 수 있게 됐으며, 그곳에서 뒤를 보게 됐다. 물이 가까이 있는 변소라니. 냄새도 없고, 더러움도 있을 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거기에 비데까지 놓으니, 손도 안 대고 뒤를 볼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뒤를 받아내던 똥통, 정화조도 사라지고, 이제는 오폐수전용 관로를 따라 대형 오폐수처리장으로 직접 내려가니 우리가 본 뒷물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게 됐다.

아직도 중국이나 동남아 나라들을 가보면 우리들의 오래전 변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공중변소의 불비함은 우리나라 공중변소의 진화를 신화처럼 보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겠지만, 기억하는 유년부터 서른이 되기까지 눈부시게 변한 우리들의 화장실 변천사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웅변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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