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위원 문경사투리보존회장.jpeg
▲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우리 난방문화는 나무였다.

땔나무 때문에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고, 그만큼 귀해 부잣집 아니고는 나무를 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통의 집은 짚, 수수깡, 옥수수대, 콩대 같은 곡식 부산물로 난방을 했다. 왕겨도 썼는데 풍로가 있어야 했다.

연탄은 우리 난방문화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부터 기름보일러가 보급된 198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우리의 난방과 화식(火食)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처음 연탄이 나오고 집집마다 부엌을 고쳤다. 온돌은 그대로 두고 부엌 아궁이를 나무 때는 것에서 연탄 불꽃이 들어가도록 했다. 아궁이와 벽 사이에 작은 관을 대고 연탄 불꽃이 그곳으로 빨려들어 가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무 불꽃이 드나들던 구들장은 허술하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연기가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런 상태에 연탄을 땠으니 난데없는 일산화탄소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무색, 무취, 무미의 일산화탄소는 공기보다 무거웠다. 사람이 방에 누워 자면 자연스럽게 섭취할 수 있는 위험한 구조였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우리는 그저 나무 안 때는 편안함에 연탄가스의 위험을 알지 못하고 신기하고 즐겁게 좋아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비틀비틀 토하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것이 연탄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 때문이라는 것을 알자, 그 편리한 도구가 공포의 도구로 변했다. 집집이 방바닥을 펼쳐 시멘트로 덧바르고, 부엌과 안방 사이로 난 문을 싸 발랐다.

그런 197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서 누나, 친구 셋이 자취를 했다. 그날은 마침 친구가 독서실에서 밤새워 공부하겠다며 나가고 누나와 둘이 자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멀리서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늘고 멀리서 들렸다. 꿈결 같기도 했다.

그래서 몸을 일으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말을 잘 안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몸을 끌고 문을 열어주게 되었는데, 바로 토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깜짝 놀라 내 등을 두드리며 누나를 깨웠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도 나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토하자 정신이 좀 들었는데, 그때부터 두통이 심하게 몰려왔다. 주인집 아저씨는 화장실에 가서 그 냄새를 맡으면 낫는다고 해 순진하게도 화장실에서 한참 동안 그 냄새를 맡고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병원에는 가지 않고, 미련하게도 학교엘 갔다. 두통은 계속 이어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눈이 침침했다.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눕고 싶도록 몸이 풀어졌다. 그러기를 몇 시간. 점심시간 전 어느 시점에 갑자기 두통이 딱 멎었다. 그리고 몸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연탄가스가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집 부엌 연탄아궁이에 환기통이 달린 뚜껑을 달고, 거기에 연통을 달아 연통 끝에 연탄가스 배출기를 달았다.

그리고 연탄보일러가 개발됐는데, 그것이 응용돼 현재 집집마다 보일러가 상용화됐다. 그러자 사람들은 연탄 난방을 멀리하고, 대부분이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 전기보일러로 난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 알뜰한 옆집이 연탄보일러와 연탄난로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이런 물건을 만드나 싶어 새삼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연탄가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보는 연탄의 감정이 왜 그리 정감이 있는지, 라면이 끓어오를 것만 같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