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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인간의 기록에는 늘 윤리와 의리의 꼬리표가 붙습니다. 도덕 교과서나 역사책이나 소설이나 그 차원에서는 모두 다 같습니다. 이를테면, ‘논어’의 공자님 말씀이나 ‘삼국사기’의 우리 고대사나 ‘춘향전’의 몽룡과 춘향의 사랑이나, 인간에 대해서 적는 사람들은 늘 윤리를 강조하고 의리를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고(윤리),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는(의리) 기록의 기본 원칙을 도외시하고는 그 무엇도 ‘인간의 기록’이 될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모든 역사적 기록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인간이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내면의 물음에 스스로 답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역사는 소설이나 영화(드라마)의 주된 소재입니다. 역사가 자신을 알리는 주된 통로가 그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그 진위(眞僞)를 엄하게 따지는 일이 한 번씩 벌어집니다.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역사적 팩트가 ‘기록’과 상이하거나 다중(多衆)의 이념이나 취향에 배치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왜곡, 조작, 망발 등의 범죄혐의가 추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소설이나 영화는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사실들의 진위 여부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논리적 코드가 아니라 심미적 코드에 입각해서 만들어집니다. 진위 여부보다 공감의 정도가 중요합니다. 물론 예술 안에는 설득(논리적 코드)과 교훈(사회적 코드)이 공존합니다. 강조든 풍자든, 그것들 없이는 독자 관객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같은 상업 예술은 더 그렇습니다. 애국애족이든, 희생과 봉사든, 반성과 극복이든, 그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와 의리가 설득적으로 제시되거나 비판되어야 합니다. 보통, 사회적 코드가 심미적 코드에 기생할 경우에는 그 형태가 아주 극단적인 것이 됩니다. 심청이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고(孝行),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서 ‘대박’의 수혜자가 되고(善行), 춘향이도 기생의 딸로 태어났지만 정경부인이 됩니다(貞節). 그런 극단적인 결말이 가능한 것은(일말의 역사적 거부감을 극복하고) 그들 효행이나 선행, 정절과 같은 사회적 코드가 예술(판소리)이라는 심미적 코드에 기생(寄生)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당대의 강요된 정답(正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대체역사소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데뷔작인 ‘가라도(伽羅都)’와 그 직후 작품이었던 ‘고비(古碑)’가 그것들입니다. 그때는 국내에서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장르 개념이 아예 없을 때였습니다. ‘가라도(伽羅都)’는 신라시대의 역사적 공백을 소설적으로 메꾸어 본 것이고 ‘고비(古碑)’는 광개토왕비 비문 조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몇 년 뒤 위작 시비가 있었던 ‘화랑세기’의 등장으로 그 역사성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후자 역시 비문 조작의 증거가 없다는 중국 역사학계의 발표로 소재의 신기성(新奇性)이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신라시대의 왕실 성(性)풍속에 대한 ‘화랑세기’의 기록은 소설 이상의 상상력의 파격을 보여주었고, 증거 없는 광개토왕비 조작설은 지나친 사회적 코드의 개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저로서는 큰 반성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역사라는 게 호기심이나 애국심 같은 것으로 쉽게 보완되거나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매일 매일의 기록으로 여기며 사는 이들을 봅니다. 최근에도 그런 분을 한 분 봤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역사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죽고 사는 법’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기록’이 우리시대의 윤리와 의리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역사의 횃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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