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쇳물축제 기획···사회공헌·동반성장활동 본격화

1988년 광양제철 2고로 화입.
2018년 올해가 포스코 창립 50주년이다.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8년, 당시 포항제철은 창립 20주년을 맞는 해.

국가적으로도 올림픽의 서울개최 등 크고 굵직한 일들이 많았지만 포항제철로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한마디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지도에 아예 나타나지 않던 바다 위에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던 포항제철은 1987년 5월 광양제철소 1기를 준공한 데 이어 여세를 몰아 이듬해 1988년 7월에 광양제철소 2기 종합준공의 감격을 맛본다. 그리고 광양 2기 준공 며칠 전인 1988년 6월 29일 노동조합이 처음으로 결성돼 활동에 들어간다.
창립 20주년 포항시내 시가행진(1988)
또 격동의 시기에 제철보국으로 국내 산업근대화를 이끌어 왔던 포항제철은 창립 20주년 즈음에 숨 가쁘게 달려온 건설프로젝트에서 한숨을 돌려 지역사회와 국제철강업계에서의 역할론에 시선을 보낸다. 포항시와 영일군민이 함께하는 첫 영일만쇳물축제를 열어 대대적인 시가행진과 연계프로그램을 선보인 것이 1988년이었고 그해 자매마을 결연과 자원봉사단 발족도 시작했다. 이와 함께 포항제철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제22차 국제철강협회(IISI)총회를 유치해 불과 20년 만에 세계철강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기도 했다.
포항 본사 신사옥 준공(1987)
이즈음 포항제철은 제철소 건설 등 생산시설 외에 업무공간 등 인프라 확충에 주력해 1987년 4월 1일 포항에 당시로서는 최신 사무시스템을 갖춘 포항 본사 건물을 준공하고 국내 첫 축구전용경기장을 갖춘다.

국내최초 축구전용구장 준공(1990)
1)대한민국의 1988년.
1988년 한국에서 열린 국제철강협회 총회.
대한민국은 1988년 가장 역동적인 한 해를 보냈다.

건국 이래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있었지만 1988년처럼 나라 전체가 들떠 있었던 경우도 그리 없었다.

국민 누구나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올림픽, 제24회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이 9월 17일 개막되었고, 2월 25일 노태우 씨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4월에는 제13대 총선이 치러졌다. 또 국외적으로도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주도 아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본격 추진되었으며, 미얀마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에 승리해 새 대통령이 되는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았다.



2)포항제철의 1988년.
1988년 포항시가 준비한 포항제철 20주년 기념행사 간담회.
1988년 그해, 포항제철에서는 회사의 미래성장의 전환점이 될 여러 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1월에 우리사주조합이 결성되고 4월 1일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는 박태준 회장이 기념사를 통해 “포항제철의 20년이야말로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투쟁의 기록인 동시에 제철보국의 의지 하나로 젊음을 바쳐 헌신해 온 제철인들의 승리”라고 포철정신을 강조했다.

또 포항제철은 6월 10일, 거래소시장에 기업을 공개하며 국민주 1호로 주식을 상장한다. 이 같은 격동의 시기에 제철보국으로 국내 산업근대화를 이끌어 왔던 포항제철은 예전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한 글로벌 철강기업으로서 품종 다변화와 경쟁력 제고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며 10월에 IISI 총회를 한국에 유치했다. 이 밖에 창립 20주년의 청년이 된 포항제철은 그동안 포항과 광양의 두 제철소건설에 매진해온 가쁜 숨을 잠시 돌리고 지역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창립 20주년을 계기로 <영일만 쇳물축제>를 만들어 시민과 함께하는 대대적인 축제를 만들어 첫 행사를 가졌으며 자원봉사단을 처음으로 조직했다.



3)국민주 1호로 주식상장
포항종합제철 국민주 1호(1988)
1987년 3월 포항제철 주식의 장외거래문제가 대두되었다.

1985년 하반기 이후 국내 증권시장은 폭발적인 활황세를 타고 있었다. 정부와 증권업계에서는 주식 대중화 시대를 하루빨리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 기업공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는 1986년 들어 공기업 민영화 문제를 정식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포스코는 이런 시대적 요청을 인식하고 1986년 10월 24일 증권전문가·대학교수·변호사 등 관련 인사들로 분석팀을 구성, 기업공개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한국증권학회에도 기업공개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의뢰해 이듬해인 1987년 4월 연구 결과를 보고받을 계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1987년 3월 25일, 주식시장 안정화를 위한 정부 방침이 발표된 것인데, 여기에는 시중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 주식을 새로 개설되는 장외시장에서 입찰방식을 통해 매각할 방침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장외시장을 통한 입찰방식에는 크나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포항제철 임직원들은 경악했다. 정부의 취지와는 달리 일부 재벌기업이 공기업을 지배할 우려가 있었고, 증권시장의 질서가 교란될 위험도 있었던 것이다.

포스코는 그래서 사활을 건 대대적인 홍보전을 통해 장외시장을 통한 입찰방식의 부당성을 알렸다. 포스코의 입장을 알리고 언론이 포스코를 지켜줘야 한다고 호소했고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거의 모든 언론이 파격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고 국민의 비난도 거세졌다.

언론과 국민이 포스코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서는 가운데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도 정부 입장을 철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특별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마침내 1987년 4월 말에 정부는 그동안의 방침을 철회했다. 이로써 민족기업 포스코는 자칫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희생양으로 공중 분해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1년쯤 뒤인 1988년 6월 10일, 포스코는 전 국민의 관심 속에 명실상부한 국민주 1호 기업으로 공개되었다. 포항제철의 국민주 공개에 따라 그동안 정부와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일부분이 국민에게 할애되어 총 27.3%가 국민에게 돌아갔다.

또 기업공개와 함께 직원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주인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종업원지주제를 처음 도입, 전체 발행주식의 10%를 직원에게 배정했다.

4)노동조합 설립.
자원봉사 등 지역사회 공헌 본격화(1988)
포항제철 역시 노사관계의 전반적인 변화라는 흐름 속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포항제철주식회사의 노동조합은 1987년 6·29선언 이후 전반적으로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에 따라 꼭 1년만인 1988년 6월 29일에 당시 제철정비, 삼풍공업, 선일기업 등 포항제철 계열사와 협력업체의 노동조합 설립투쟁의 결과로 박태준 회장의 노동조합 인정 담화문 발표와 동시에 설립이 인정되었다. 포항제철 노조의 결성을 신호탄으로 노조가 없던 많은 포항지역 기업에 노조가 생겨났다.

5)1회 영일만쇳물축제 그리고 자매결연.
1988년 쇳물축제 가장행렬 모습.
포항시와 영일군, 포항종합제철이 공동주최하는 영일만쇳물축제는 포항제철의 창립 20주년이 되던 1988년 처음 시작된다.

주민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축제기간 동안 시민, 군민 걷기대회와, 프로축구대회, 수석·분재·서예전시회등 각종 행사를 개최했다.
1988년 쇳물축제 시민걷기대회.
대표적인 행사로는 해병군악대 농악대를 선두로 포항시청앞에서 종합운동장까지 4.5㎞ 구간에서 열리는 시가행진. 이 축제를 전후해 포항제철은 1988년 이후로도 몇 년간 포항과 영일지역 국민학생 6만여명에게 연필을 기념품으로 지급하고 지역 고아원, 양로원, 불우단체, 영세모자, 소년소녀가장가구를 방문, 의류와 각종 생필품을 전달했다.
1988년 영일만쇳물축제 시민 위안공연.
영일만쇳물축제 시작을 계기로 회사는 사회공헌활동과 동반성장활동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포항제철은 1988년 광양 하광마을과의 자매결연을 시작으로 포항·광양 지역사회와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사회공헌활동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해온 포스코에게는 지역사회가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에 포항,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활성화와 사회 복지를 위해 이때부터 부서별 자매마을 결연 활동을 본격화한다.

이 같은 파란만장한 1988년을 보낸 포항제철은 광양제철소 2기 준공과 동시에 1988년 그해에 광양 3기 착공에 들어갔고, 곧 이어질 광양 4기 준공을 통해 마침내 1992년 조강생산 2,100만 톤의 ‘철강 4반세기 대 위업 달성’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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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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