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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옛날 중국무협영화 가운데 ‘영웅(英雄)’(장예모·2002)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진시황을 죽이려던 자객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 시절이라 그 영화의 허세(虛勢)가 보기 좋았습니다. 스크린을 박차고 나올듯한 현란한 무예(武藝)와 자극적인 색감(色感), 그리고 대의를 위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영웅들의 호방한 생과 사가 작은 새장과 같은 현실에 갇혀 사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언제 지나간 지도 모른 채 몰입해서 영화를 봤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영화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직업적 관심 상 영화를 몇 번씩 반복적으로 보는 게 제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유도 생각하기 싫었습니다. 그냥 보기 싫었습니다. 영화 취미가 비슷하던 시를 쓰는 의사 친구가 그 무렵에 제게 말했습니다. 친구나 저나 서로 그쪽에 약간의 조예가 있다고 상호 인정을 하던 사이였습니다. “무협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저는 그 친구의 말에 선뜻 동의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먼 산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소인(小人)된 입장에서 그 영화에 등장했던 모든 이들이 하나 없이 영웅들이었고 대인들이었던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왕이든 자객이든, 선생이든 제자든, 주인이든 시종이든 누구 하나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추호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고대 중국은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고 필연적이고 정당하고 근원이 되는 세계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하나의 에로스’였습니다. 감독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영화 속의 진시황처럼) “사는 게 하찮다고 생각하지 마라. 삶은 늘 엄숙하다”라고 관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게 싫었습니다. 영화 주인공(이연걸)도 싫었습니다. 그는 본디 무예가 출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영화에서도 자신의 무예 실력을 뽐내는 게 싫었습니다. 저는 영화와 실제가 경계 없이 섞이는 것이 싫습니다. 실제에서는 전혀 무술을 할 줄 모르는 이가 영화 속에서 뛰어난 기예를 보여줄 때가 훨씬 더 재미있고 실감이 납니다. 그래야 판타지가 제대로 작동이 됩니다. 현실이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 분수없이 간섭하게 되면 판타지의 영토는 어쩔 수 없이 참절(僭竊)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그 영화를 다시 봅니다. 오래전에 망각 속으로 편입된 옛날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늘 좋은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 젊은 평론가가 제가 모르던 사실 하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무명(無名·이연걸)은 분명 국가주의의 논리(天下觀)에 투항한다(진시황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장예모는 단순히 화려한 영상을 만드는 게 아닌 시각적 화술, 시각적 은유의 대가이다. 서당(書堂)에서 글쓰기 연습이나 하는 서생 몇몇을 죽이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장면이나 무명이 처형당할 때, 단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곤 보기 어려운 엄청난 화살이 동원되는 장면을 보자. 이건 단순한 대륙적 과장이 아니다. 제국의 권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항사유의 이념과 그것을 지닌 ‘한 사람의 등장’을 두려워한다. 이 연출은, 강력해 보이지만 내실은 허약한 전체주의 정권의 속성에 대한 은유로 읽어야 한다. 장예모의 중화(中華) 3부작(영웅, 연인, 황후화) 중 첫 편이라 할 ‘영웅’은 중화제국 성립의 원형을 고대(진시황의 등장)에서 찾는 동시에 그 권력의 내밀한 속성을 그렇게 암시하며 끝난다”(조재휘, 페이스북) 그렇습니다. 영화 ‘영웅’의 주인공은 ‘무명(無名)’입니다. 이름이 없는 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 소인들의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낸 불패의 환상이었습니다. 행여 사람이 먼저일 지도 모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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