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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사투리보존회장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시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홍보용으로 글을 지었는데, 그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있다. 중국 역사와 대비해 조선의 건국과 발전이 당연하다는 노래가사다.

조선은 중국 역사에 견주어 손색없으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세, 꽃 좋고 열매도 많네,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세,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르네’로 귀결되는 나라인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 좋고 열매 많은 것, 샘이 깊은 물은 가물지 않아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러운 섭리다. 그런데 이런 깊은 뜻이 있는 글을 한글로 표현하니 당시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낯섦이요, 유식한 사람들만이 아는 문자를 일반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은 충격이었다.

이는 한글이 창제된 1446년 이후 500년이 지나도록 우리 문자 생활에서 한글이 늘 낯섦으로 여겨 온 것을 발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나라 유식자들은 그동안 말은 우리말로 하면서 문자는 한자를 썼다. 이중 언어생활이었다. 한자를 써야만 유식하다는 인식. 그것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문경문학관에 들어갈 ‘문경문학연혁’을 만들기 위해 문경사람들의 문집을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제강점기 이후, 아니 2000년 이후에도 한자로 문집을 만든 분들이 꽤나 있었다. 필자가 보고 들은 것이 적어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한자로 된 문집을 낸 분들의 학문의 깊이나 사상의 넓이가 한자를 당연히 써야 했던 시대의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구태여 한자로 된 문집을 낸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글로 표현 못 할 것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직 한자를 써야만 유식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란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한자로 문장을 할 줄 안다는 것도 외국어 한 가지를 확실히 아는 것이니까 유식한 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한자 이외의 문자로 쓴 책을 흔히 보지 못했다.

우리말에 한자가 70%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를 알아야 우리말을 잘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500년 이상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거의 대부분 일상의 말을 한자와 같이 쓰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인식체계를 갖추었다. 더 이상 그런 말은 필요 없다.

똑똑한 전화기 시대에 한글은 편리하기 그지없는 문자다. 중국은 휴대전화 자판에 자국 글자를 넣을 수 없어 영어 알파벳을 응용해서 쓰고 있다. 한자는 그만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문자다. 그래서 중국도 번잡한 글자를 간편하게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그것이 간체(簡體)다. 우리가 쓰는 한자를 안다고 알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같은 한자라도 새로 공부해야 알 수 있다. 현재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쓰는 번체(繁體)는 또 다른 외국어다. 마찬가지로 현재 중국 간체는 우리에게 한자 외의 또 다른 외국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 일각에서 한문을 숭상하고 겉을 핥으면서 한자를 유식한 글자로 인식한다면 오히려 무식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깊이도 없이 한자 좀 안다고 난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한문은 우리말로 잘 옮길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넘겨 그들을 통해 잘 번역된 내용으로 쉽고 간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 국민은 말과 글을 더욱 아름답게 갈고 닦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자로 더욱 내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용비어천가를 지어 백성에게 한글로 문자생활을 하라고 하신 선현들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요, 우리 문화의 뿌리와 샘을 깊게 하여 우리 문화를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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