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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EBS 방영 ‘한국기행’은 숨은 비경을 탐방하는 교양 프로이다. 언젠가 남해안 청산도 봄날이 소개됐다. 백련암 사십대 두 비구니가 ‘범’이라는 이름의 애견과 함께 봄나물 뜯는 흥취를 그렸다.

청산도는 하늘·바다·산이 모두 푸르다 해서 붙은 명칭. 그냥 듣기만 해도 짙푸른 어감이 찰랑댄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도서로, 유채꽃 미소와 청보리 물결의 영화가 사라진 만추의 풍광은 어떠할까.

집안 벽면에 뭔가 걸거나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달력과 시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내걸린 글귀가 있다. 액자도 없이 한지에 써넣은 서예 작품 그대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동해안 영덕의 고찰 장육사를 창건한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선시다. 수년 전에 산사를 방문한 나에게 따끈한 녹차와 더불어 내주신 주지 스님의 손길. 거실의 눈높이 위치라 저절로 시야에 들어온다. 일상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음미하는 습관이 생겼다. 문득 성정이 침잠해지는 기분에 젖는다.

청산도를 향한 갈망은 상당 부분 나옹선사의 한시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된 욕구였다. 초봄 북상하는 초록빛 새싹과 임무 교대하듯 단풍이 남하하는 만산홍엽 늦가을, 이박 삼일 동안 청산도와 보길도를 찾는 장도는 설레었다.

여정의 자투리 틈새에 들른 명소가 장흥의 ‘편백숲 우드랜드’이다. 산중턱 삼나무와 편백나무 삼림을 조성했다. 숲속 데크 산책로가 길게 이어진다. 기천 원의 요금이 아깝지 않은 관광지. 산림청 권장 조림 수종인 편백나무는 피톤치드 발생이 가장 많고, 내장재와 가구재로 인기다.

고대 중국은 수목에 신분적 지위를 부여했다. 천자인 소나무 다음으로 편백은 제후로 쳤으니 고급스런 목재임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편백나무와 인연이 어렸다. 이틀 밤을 신세진 지인의 별장도 실내 장식을 편백으로 꾸몄다. 건축한 지 얼마 안 된지라 나무가 내뿜는 향기가 은은했다.

완도항에서 청산도까지는 한 시간이 못 되는 뱃길로 청산농협이 여객선을 운영한다. 수협이 아니라 농협에서 수행하는 바닷길 사업이라니. 아마도 반농반어 주민에다가 대자본이 필요해 그럴 것이다. 선체에 관한 안내도가 보인다. 차량 48대, G/T 997톤, 스피드 16노트 등이다.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다섯 명이 모두 농협 직원.

우리 일행은 유유자적이 아니라 강행군하는 여로를 즐긴다. 이곳 슬로길을 알뜰히 걸었다. 새벽에 일어나 빵 하나 먹고는 다섯 시간 가까이 걷다가, 늦은 오후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으니 말이다. 섬에는 때맞춰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처음 동행한 모씨는 기진맥진 이튿날 보길도 투어를 포기했을 정도다.

예술가는 위대하다. 대문호 셰익스피어 덕분에 관광객이 몰리는 ‘줄리엣의 집’이나, 영화 서편제 촬영지인 당리 언덕은 임권택 감독의 은혜를 입었다. 세계농업유산에 등재된 구들장논, 도서 지역 독특한 장례 풍습인 초분이 이채롭다.

섬은 한사코 육지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섬사람 소망은 모세의 기적이다. 육지와 섬을 잇는 연륙교를 놓고, 섬과 섬이 통하는 다리를 만든다. 그 순간 섬은 섬의 맛을 잃는다. 유자가 못된 탱자처럼 말이다. 물길을 헤치고 닿아야 진짜 섬이다. 진도나 완도는 왠지 모자란 섬의 정취다. 뱃길로 달려간 청산도는 그래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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