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형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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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作
마지막 건물의 모퉁이를 돌 때 내가 본 것은 고무나무였다. 비스듬히 비춰드는 길어진 빛 사이사이 내 모습을 닮은 그림자를 밟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저녁 해를 받아 건물은 반쯤 그늘 속에 잠겨 있었고 절반은 햇살에 무기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무나무 또한 깨진 화분 속에 간신히 몸을 기댄 채 있었다. 누군가 먹다 버린 술병에서 흘러나온 술이 썩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 건물은 몸이 쪼개지려 하는 트랜스포머 영화 속의 로봇 같네. 막 껍질을 벗은 그 무생물 말이야. 이곳에는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직하게 속삭이며 진경은 내 옆구리를 쳤다. 빨리 이곳을 떠나가자는 뜻이었다. 더 볼게 뭐 있어. 이제 다 끝나 가잖아. 그냥 여기서 마치자.

멀리서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같은 휴일엔 지하철 배차간격 틈이 길었다. 늘어난 헌 옷 무더기처럼 건물은 텅 비어있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폐가전 제품들이 가득했다. 다리가 하나 빠져버린 채 남겨진 의자며 자개조각이 군데군데 박힌 깨진 거울. 부서진 플라스틱 서류상자와 한 짝만 남아 뒹구는 검정 삼선 슬리퍼. 이런데다 마음을 두다가 잘못되면 슬픔의 늪에 발목이 빠져버릴 거다. 이런 풍경은 위험하게도 우울하지. 그렇게 마음이 다치기도 할 거야. 이제 뒤돌아가자. 하필 이곳이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고 재개발이 일어나는 도심의 슬럼지역이었기에 버려진 가구나 폐가전 제품들이 바다위의 섬처럼 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런 곳을 골라가며 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 어깨에 배낭 한 가득 지고 와서 버리기에 힘든 것들을 던져 버리거든. 아니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을 버리지. 어쩌면 버리려면 돈이 무척 드는 무거운 것들을 도둑처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이곳이 버려진 것들로 위험하다고 그러지. 진경이 말했다.
여기 어딘가 감시 카메라가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우리들도 화면에 찍힐 수도 있겠지.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경찰이 우리를 소환할지도 몰라. 
아니야 우리는 할 일을 하는 거라고, 공무수행중이라고 해야 하겠지.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동네였다. 진경은 앞질러 허둥지둥 걸어 나갔다. 이곳이 마지막 건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인 일조로 도시 속 버려진 건물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고무나무를 봐.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치 나를 데려가세요, 라고 말하듯이. 나는 건물의 귀퉁이에 버려진 화분 속 그 고무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도 이곳처럼 그럴까? 이곳처럼 그럴까 라는 말은 씁쓸하다. 이곳에서처럼 전혀 보호받지도 못하고 누군가의 말처럼 거지처럼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싶지 않았다. 이곳처럼 그곳이 그럴 거라는 것은 나의 상상이 불러온 화면이 아닐까 싶었다. 그 애가 낯선 타국의 땅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어딘가로 숨어들어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대체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하지도 못한다. 그 애에 대하여 이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졌으니까. 

진경은 내게 되물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달라지겠어. 걱정 마. 너무 예민하게 보면 그렇게만 보일 거니까. 좋게 생각해.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알 수 없는 장소에서 그 애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모른다는 게 답답해서 때로 밤이면 나는 뒤숭숭한 꿈자리에 잠을 설쳤다. 

그래서 더 미치겠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 건물 안 어디선가 들려올지 모르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이곳 어딘가 그 애. 바로 나의 동생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빛이 되쏘이듯 환하게 보이는 거리였고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는 조용한 뒷골목이었다. 어쩐지 습기 찬 건물의 내부가 구월의 햇살에 이제 막 거풍이라도 하듯이 사지를 비틀고 있는 것 같았다. 진경과 나는 함께 건물조사라는 T구청의 공적인 업무를 하고 있었다. 어서 마치고 맥주 한 잔을 나누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여름이 끝났지만 오후 나절 세 시간 내내 거리를 걸어 다닌 피곤함은 맥주 한 잔으로 쉽게 다 사라지지 않았다. 일정한 지역의 오래된 건물들이 지난해 와 같이 그대로 등록된 사업체를 운영하는지 아니면 폐업이 되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하는 일이었다. 

도시가스 검침 일을 하던 진경은 일이 끊어지고 난 뒤 어디선가 의뢰받은 건물조사 일에 뛰어들었다. 혼자 다니기에 심심하다는 말과 함께 이 주일 동안 수고를 하면 맛있는 밥과 맥주 값과 수당의 절반을 주겠다는 말에 함께 다니기로 했다. 처음엔 소소한 소일거리로 여겼다. 진경이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혼자서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전철을 타고 번화가로 나가 진경과 간단한 저녁을 먹고 함께 맥주를 마시고 헤어지는 일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위가 남은 구월의 초순, 다음날 마지막 하루치의 일을 남겨두었지만 맥주의 쌉쌀한 뒷맛만큼 오후의 잔광 속에 흔들리던 깨진 화분 속 작은 고무나무가 마음에 남았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충분히 그랬다. 해결되지 않는 일 한 가지를,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여전히 나는 짐처럼 등에 지고 다녔으니까.
 
아무래도 그 애는 그런 생활이 맞을지도 모르지. 외국에서 떠돌아다니는 인생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늘 돌아올 거라고 말하고도 벌써 몇 년이 지나버렸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그걸 알아내는 것도 점차 사실 두렵기도 했다. 때때로 언젠가 그 애를 만날 때 낯선 모습으로 나이지리아 아부자 거리 어디에선가 오늘 본 그런 낡은 건물의 지하쯤에서 걸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나는 무얼 걱정하는 거지. 이런 걸 그 애의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이 모든게 그 애 이마에 있던 그 흉터 때문이라 해야 할까. 어쩐지 잘못될까봐 두려워 하고 있지만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 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촉수를 더듬어 가당치도 않은 예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 밖으로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인생이여, 모두 평화롭기. 인생이여 평강하기를. 그렇게 주문처럼 외웠다. 

"나이지리아 아부자 거리에서는 달리는 도로 한 가운데 그냥 사고로 한 두 사람 죽은 경우가 허다하게 많아. 여기서는 그냥 하루 동안 일어나는 사고라는 게 너무도 일상적이야. 그냥 달리던 자전거에 싣고가던 화분이 깨지고 흙과 모래가 부서지고 나무가 뽑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죽어가기도 하지."

그 애는 너무도 태연하게 그 말을 했다. 그 말은 언제 들었던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하는 일이 성사 될 듯 하다는 말을 듣던 그 날. 오래전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사십구재를 마치던 그 날이었구나. 육 년 전 쯤 이었다. 그렇게 누군가 갑자기 사고로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 사람이 살 곳인가 싶어서 빨리 그곳에서 나오는 게 어떻겠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모였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말다니. 그곳은 왜 그런다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가. 아니면 치안이 형편없어서인가, 하고 되쏘듯 물었다.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언제가 길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 얹힌 닭장처럼 툭 떨어질 수 있음을 뜻하는지 씩 웃었다. 그래도 무한한 자원이 있는 나라야. 석유가 그 나라의 힘이지. 느긋하고 스케일이 큰 나라지만 정세가 불안해. 너무 스케일이 커서 감당이 안 될 만큼이야 라고 그랬다.

너무하군. 너는 사람 걱정을 시키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제발 그곳에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 벌써 그곳에 간지 오년이 되어가지 않니. 도대체 그곳에서 무얼 하는 거니? 돈은 벌고 있기나 한 거니?  

그랬었다. 그 애는 어쩐지 그렇게 낯선 곳을 떠돌다 빈 건물 속 혼자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연락이 없어진지 몇 달이 지나고 말았지만 모두 서로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뜻을 이루기 어렵다면 방향을 바꿔서 길을 달리 가봐야지. 그 뜻이라는 것도 이제 너무 멀리 떠나버린 것 같았다. 

오래전 그 먼 곳에서 힘이 들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세상 힘 안든 곳이 어디냐며 너는 주섬주섬 양말을 꿰신 듯이 발바닥을 긁으며 그리 말했다. 삼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친척의 장례식이었고 그 애는 마침 한국에 며칠 다녀갈 일이 있었기에 요행히 친척어른의 장례식에 나타날 수 있었다. 
잘 왔어. 모두 너의 소식을 궁금해 하고 있어.
장례식장 군데군데 펼쳐진 탁자 위로 눌린 돼지 머리 고기와 과일과 육개장이 놓였고 다 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살아계신 분들 중에 가장 연장자였던 고모부가 여든넷으로 돌아가셨기에 이제 남아있는 사촌들 중에 나이가 높은 사촌 오빠가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 술을 권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수도가 어디야. 나이지리아는 어떤 언어를 쓰지?

젊은 날 외국에 나가 빌딩건설에 참여한 적이 있던 그 사촌 오빠는 귀가 점점 어두워 가는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물었던 말을 또 물었다. 자칭 건설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오빠는 자신이 아직도 뭔가를 배우러 다닌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무얼 배우세요? 뭐든지. 어쩌면 퇴직이 가까웠기에 알 수 없는 조바심에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도대체 무얼 해서 무역을 하는 거야? 그곳에도 영어는 통용되나? 사람들은 무섭지 않아? 내가 십년 전 쿠바에 간적이 있었을 때 말이야. 무척 힘들었거든. 나라는 아름답지만 외국생활은 힘들지. 음식도 언어도 나이들면 어려워. 나이지리아도 만만하지 않을 거야. 어찌 살아가누.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테러와 잠깐씩 듣는 해외뉴스 속의  납치 사건을, 부정부패 혹은 나이지리아 대통령에 대해 친척들은 물어 왔었다. 사촌들은 물었던 말을 묻고 또 물었다. 모두들 그 애가 이미 나이지리아에서 자리를 잡았어도 한참은 되었을 것이라고들 여겼을 거니까.

아부자예요. 아부지가 아니라 수도 이름이 아부자. 영어를 주로 쓰지요.
테이블 위에 맥주가 금방 떨어졌다. 사람들은 웃으며 지난 시절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좀 제대로 인생이 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딱 그 지점이 보인다고 누군가 말하고 있었다. 잘 나가던 사람이 망하게 된 것은 그 어느 순간은 바로 싸가지가 없어지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잘 들어보세요.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보이는 특징이 딱 하나 있다면 세상을 읽는 눈이라는 얘깁니다. 빠릿빠릿한 눈. 안목. 우리 부서에 부장이 날만 새면 하는 얘기라니깐요. 이제 막 과장이 되고 초등학교 딸을 데려온 먼 친척동생이 말했다. 모두 맥주를 시켜서 잔에 가득 따랐다. 

울다 지친 고모도 조카들을 보자 상 위에 오른 떡이 오늘 따라 쫄깃하다고 칭찬했고 다른 병원의 장례식장 편육은 맛이 없다는 소문이 오간다고 말해주었다. 돌아가신 분의 지난 이야기는 드물게 들려왔다. 그 장례식의 주인공들인 고모집의 딸들은 어릴 적부터 요란한 성격이었는데 모두들 검은 상복 입고서 울다가 웃다가 문상객을 맞아 들였고 중간 중간 휴대폰을 하러 자리를 뜨거나 그랬다. 차라리 몇 년 전 고모부가 입원했던 병실에서는 수심에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이제 더 편안한 얼굴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와 동갑인 고모의 셋째 딸인 사촌은 끊지 못한 담배를 피우러 살짝 밖을 나갔다 들어오기도 했다. 고모부는 시름시름 노환을 겪다가 아주 평화롭게 임종을 맞았다고 했다. 여든둘을 넘기며 혈압이 떨어지고 근력이 저하되고 소화가 안 되면서 섭생에 어려움이 왔다. 그러다가 걷기가 힘들어지자 세 명의 딸들이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해서 병원에 쉼 없이 고모부를 데려다 놓았고 병원을 오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링겔병을 꽂고 약을 먹여가며 고모부가 이 삼 년을 더 살도록 끌었다. 명이 길었겠지만 세 명의 딸들, 즉 사촌언니 둘과 동갑인 사촌이 결혼을 잘 해서 그런대로 잘 살았기에 늙은 아버지 드시고 싶다는 것은 어디서라도 사서 대령을 했다고 고모는 자랑했다.

세 딸을 연거푸 낳은 고모에게 아들을 낳을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여편네라고 욕을 퍼붓던 고모부는 이후 늦게까지 딸들의 덕을 보았다. 늦게 낳은 막내아들인 사촌은 늦은 발육과 공부에의 부진으로 그다지 만만하지 못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지금도 독립하지 못한 채 고모의 근심거리고 남아있었는데 그래도 딱 한 가지, 상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기에 어쩐지 고모부가 그토록 원하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다.  

이부자리를 펴놓은 고모 집 안방, 장롱 옆 자리에 천천히 숨을 몰아쉬다가 가셨다고 하는 고모부의 마지막은 살아왔던 삶에 비해 너무도 평범하고 조용한 임종이었다. 쉰이 되기 전까지 젊은 날의 고모부는 꽤나 파출소를 들락거리며 성질대로 술판을 엎기도 하고 공사판 연장을 휘두르며 사람들과 싸움도 많았었다. 낡은 트럭 한 대로 토건업과 공사장의 십장을 했던 고모부였지만 무엇보다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교양을 첫 손으로 여기던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고모부는 오래전 어린 딸들과 고모와는 겸상을 하지 않았고 혼자서 둥근 밥상에 독상을 차지했다. 일본식 미닫이문과 일본식 화조가 그려진 낡은 벽장문이 있던 고모부의 집에 놀러가서 나는 처마 끝에 달려있는 조롱 속 눈처럼 흰 문조 한 쌍을 보았다. 문조는 이상하게도 고모부만 다가가면 늘 쪼로롱거리며 노래했었다. 그게 두고두고 신기했었다.
 
그래 너는 원래 영어를 아주 잘했지. 우리들 중에 착실하다고 칭찬도 들었잖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오늘 돌아가신 이 고모부님도 너를 아주 귀여워했어.   

술을 권하는 이미 환갑을 넘긴 사촌오빠는 오래전 돌아가신 늙은 백부를 그대로 빼 박아 닮아갔다. 젊었던 오빠가 팔년 전 여든 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백부를 흉내 내는 것 같은 장례식 장이었다. 우리들은 마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속에서 기록된 그 만큼만 천천히 움직이는 영상물인지도 모른다.그렇게 모인 친척들은 그 애의 외국생활이 궁금했을 것이다. 이제 대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나이지리아에는 무슨 일을 하지. 뭐로 먹고 사는 거야.

현대 중공업에서 일하며 이력을 착실히 쌓아온 또 다른 사촌 오빠는 나이지리아 같은 개발도상국은 알만큼 안다는 듯이 물었다.   
다들 왜 그리 관심이 많지? 다섯 병이나 되는 맥주병이 비고 난 뒤 그 애는 나를 건네 보며 말했다. 나이지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왜 그렇게 의심을 하는 것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애가 불편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자리를 뜨자 친척들은 남은 돼지머리고기를 먹으며 서로들 바라보며 물었지. 나이지리아에서 도대체 왜. 그런 곳에서 무얼 어떻게 한다고 세월을 보내고 있지. 빨리 불러 들여야지. 외국인 노동자들 한국에서 일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하는 소린가? 그 애는 순간 나이지리아라는 그 알 수 없는 나라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떠돌이 같은 낭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그 애의 정체모를 사업이라는 것이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기름을 중국에 수출한다는 기업과 관련이 있는 일이란 것을 알았을 때 친척들은 브라질과 중국 주식에 대해 다시 열을 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글로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어. 우리 이 친척 중에 글로벌한 비즈니스맨이 탄생하겠구나. 잘해봐라.

사촌들과 모여 있는 내내 그 애는 몇 번이나 자리를 앉았다 일어났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용아. 네 이마에 그 흉터 때문에 네 엄마가 참 속을 많이 끓였다. 이제 나이 들고 흉터 흔적도 없어졌으니 편히 살게 될 거다. 고모가 그 애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그 날 친척의 장례식에서 그 애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장례식 다음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을 만큼 시간이 그날의 풍경을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그러니 그 폐허처럼 사람들이 떠난 건물에 뒹구는 슬리퍼 한 짝을 보자 나는 그 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너 달 전부터 전화도 카톡도 되지 않는 그 애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나는 어린 미아를 가진 어미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이지리아 아부자 거리 어느 햇살 속에서 그 애는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겨우 지탱하는 하루를 사는 것일까. 그곳에도 고무나무 하나쯤 있을까 싶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사라지려고 작정한 듯 살고 있는 그 애는 하나 밖에 없는 나의 동생이었으니까.

저녁 햇살에 그 화분속의 고무나무는 꿋꿋하게 서 있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시들어버린 작은 고무나무 한 그루에 대한 안쓰러움과 깨진 화분에 담긴 흙 때문 일거다. 한때 나도 고무나무를 키웠던 적이 있었다. 아니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이사를 하면서도 화분을 버리지 않고 때로 고무나무도 식구처럼 여기고 거두어들였으니까.



어렸을 때도 마당 좁은 그 집에 고무나무가 있었다. 파란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고무나무 잎은 잘 자랐다. 동생이 다섯 살 정도일 때 교육보험이란 것을 들고난 뒤 보험아줌마가 어머니에게 선물로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잘 클 거야. 보험 들어 놨잖아. 공부 잘해서 대학 갈 때 보험금 받아 등록금 할 때면 이 고무나무는 훌쩍 커 있을 거니 두고두고 생각 날거요.

고무나무가 잘 클 것인지. 동생이 잘 클 건지 모르지만 그 말에는 힘이 들어있었다. 어쩌면 그건 색다른 그 보험 아줌마의 특급 영업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고무나무에게 물을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색종이처럼 돌돌 말린 고무나무의 새순이 커 오르더니 하룻밤 사이에 잎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무는 커가는구나. 이후 새로운 잎이 생겨날 때마다 기쁘다기보다 그 작은 잎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서 그 고무나무의 새순이 무섭기도 했다. 보험금을 꼬박꼬박 받으러 오는 그 아줌마처럼.

이후 고무나무는 우리 집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대학교 때 오래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을 때 보면 고무나무는 키가 두 배로 자라 있었다. 늙어가는 어머니의 삶에 순하게 커 나가는 아이처럼 고무나무는 말을 잘 들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물을 주고 잎을 반짝거리도록 닦아주면 잘 자랐다.

오래전 고무나무의 싱싱한 잎을 장난스럽게 땄을 때 흰 점액질 물질이 흘러나오자 어머니는 나를 야단쳤다. 고무나무가 상처를 받았다고 여겼다. 마치 아들인 그 애를 지키듯이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오래도록 나무와 함께 늙어갔다. 어머니에게는 그 고무나무 말고도 키우던 다른 나무들이 꽤 있었다. 고무나무는 어머니에게 아이처럼 남아 기쁨을 주기도 했는데 그 어떤 아이보다 투정도 까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커다란 소철도 있었다. 커다란 화분에 담긴 소철 또한 오래 전부터 어머니가 키워 왔지만 이후 삼십년이란 시간이 흘러도 제대로 자라나지는 않았다. 강한 사랑이란다, 소철이 품은 깊은 뜻은. 그래서 그렇게 자라기가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너무 강한 사랑은 인간들 사이에 이뤄지기 어렵다. 부모 자식 간에도.

겨울날, 어머니 친구들이 모여들어 오래된 옷의 실을 풀어내고 다시 뜨개질을 하며 모이던 때였다. 그 친구들은 입 모아 소철을 칭찬했다. 뭐 그리 칭찬할게 있을까 싶었지만 소철은 당시 흔한 수종이 아니었다. 거실 안은 햇살이 들어 따뜻했다. 창가에 놓인 소철은 귀를 열고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흔 중반의 여인들이 귤을 까먹고 뜨개질을 하고 서로 어울려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온돌방의 퀴퀴한 메주냄새가 겨울동안 집안에 감돌았다. 곰팡이 냄새가 떠다녔다. 얼어터질까 싶어 소철 화분에 낡은 빨간 스웨터를 감아두었다. 소철의 초록 잎은 겨울에 더욱 번뜩였다. 침을 닮은 잎사귀처럼 소철은 원래 강한 애정이라지. 잘 크려면 쇠붙이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녹슨 칼을, 쓰다만 쇠로 만든 막대기를 화분에 꽂아두었다.

어머니에게서 나온 우리 세 명의 자식도 그랬다. 애써 물주고 거름 주고 고급스런 화분에 키워도 나중에는 별 소득이 없이 어쩌면 어미 가슴에 멍이 되기도 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제 앞가림을 하는 날까지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게 까칠한 소철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귤을 까먹고 색색의 털실을 가르고 나눠서 꽈배기 모양을 넣은 남편들의 조끼를 뜨개질 하던 동네 여자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확신하건데 고무나무와 소철이 그 이야기 속에 빛나는 조연을 맡았다. 나무들에게는 다 듣는 귀가 있다는 것이다.

자라나는데 느려 터진 소철은 그렇다고 쉽게 죽지도 않았다. 커가는 내내 좋은 거름을 가져다 뿌려주느라 애를 썼어도 소철은 결코 곁을 내어준 적 없는 냉정하고 도도한 연인처럼 굴었다. 또 어머니에게 한 몫을 단단히 잡아내려는 말썽꾸러기 자식처럼 유난히 게으름을 피웠다. 십년 동안 단 십 센티도 자라지 않은 듯 했으니. 진작 알아봤어야 했다.

이마에 흉한 상처자국을 가진 그 애를 달래기도 하면서 어머니는 우리들이 더디게 자라는 소철처럼 까칠하기도 한 시절을 보내고 또 둥글고 부드러운 고무나무 잎처럼 반들하고 싱싱하게 자라나던 시절을 건너간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애의 이마 흉터의 탄생에는 어린 나의 철없음도 함께 했다. 어쩌면 지금 그 애의 얼굴 반을 가르고 가는 나이지리아 아부자의 햇살에 아직 남은 흉터자국이 선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내게 알 수 없는 슬픔도 가져왔다.



흉터의 이야기를 하자면 수정동 비뚤한 계단이 있던 위태로운 작은 방에서 우리의 기억이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그 집안으로 들어가자면 기울어진 마당을 들어서야 했었다. 아버지가 멀리 돈을 벌기위해 나갔고 아버지가 없는 일 년 동안 돈을 아끼느라 허름한 셋방에 살았었다. 오직 시멘트에 벽지만 대충 발라놓은 단칸방이었다. 일곱 살과 다섯 살인 나와 동생이 좁은 방에서 늘 술래잡기를 했었다. 잊고 있었던 일곱 살 때의 그 일이 나이 들어가면서 영사기를 돌리듯 한 컷, 한 컷 또렷하게 나타났다.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어린 동생을 뒤쫒았고 자그마한 스텡 밥그릇에 과자를 담아 뛰어가던 동생은 그만 미끄러져 방바닥에서 부엌의 아궁이 쪽으로 굴러 떨어졌었다. 들고 있던 스텡 밥그릇 위로 엎어지면서 동생은 이마가 한 뼘이나 찢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었다. 어머니 품에 안겨 병원에 가던 동생을 보고도 일곱 살의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건가. 그저 방바닥이 미끄러워 뛰어가던 동생이 넘어져 굴러 떨어진 것일 뿐. 과자가 담긴 날카로운 스텡 그릇을 끝내 버리지 않은 동생에게 불운이 있었다. 그 수정동의 계단이 비뚤하던 그 집에서 어머니는 이후 재빨리 이사를 나와 버렸다. 재수 없는 집이다. 길도 비뚤어지고 방도 기울어져 있고. 벽지도 울고 창문도 삐거덕 거리고. 벽지 속에는 집게벌레가 기어 다니며 알을 까고 있고 천정의 전등에는 비가 샌 얼룩이 나 있었으니까. 이마를 기워놓은 동생의 얼굴이 어머니에게는 오래도록 멍이 되었을 거다. 늘 비뚤한 계단에서 떨어져 너희들 다리를 다칠까 걱정이었는데, 밤톨 같은 이마를 깼구나. 남자아이 얼굴에서 이마가 깨끗해야 하는데 저 흉터로 남들에게 사납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자는 동생의 얼굴을 매만지며 애가 탔을 거다.

그곳을 떠나 이사를 하던 날 계단에 놓여있던 화분들을 안고 나왔다. 이사를 한 곳을 수정동 계단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번에는 손을 보고 방위를 보고 좋은 날을 받아서 이사를 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하니 넘어지면서 눈이라도 다쳤으면 어찌했을까. 눈먼 아이가 되었다면 그 죄를 어찌 다 받겠나 싶어서 어머니는 동생의 이마에 흉터난 거 감사하다 여기고 지냈다. 어머니의 가슴에 안고 있던 작은 고무나무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일곱 살이라 희미하지만 빗물에 붉은 피가 번지던 그 모습만 떠올라온다.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는 동생을 껴안은 어머니는 눈앞에 깜깜했겠지. 마치 깨진 도자기를 붙들고 조각난 부분을 눈물로 이으려는 듯. 이후 지그재그로 솜씨 없이 급하게 외과 수술을 마친 동생은 아주 오랫동안 그 이마의 칼자국 같은 흉터를 안고 살았을 거다. 학창시절 흉터를 가리느라 가르마를 반대로 타서 머리를 빗고 웬만해서는 이마의 머리칼을 걷어 올리지 않았다. 지난 시간 나는 단 한 번도 동생에게 그 때 그 일을 사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이마의 흉터 때문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동생의 운명은 늘 아슬아슬했다. 공부를 무척 잘 했음에도 대학 입시를 치르는 것이 힘들었고 대학교 시절 운동권의 친구들과 이어져 있는 바람에 졸업의 시기도 늦어졌다. 저 이마의 흉터 때문이지. 이마의 흉터가 아물 때까지 이후 두어 번 성형수술을 더 했다.



살이 낀다는 것. 몸에 흉이 여러 개 져 있을 거라는 역술가의 말에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이사를 한 번 더 했다. 몸에 불기운이 많은 아이라 제 몸이 성하지 않을 거야. 물이 가득한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해. 어머니의 이사는 바닷가 동네로 옮겨가면서 끝을 맺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이층 방 창문에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키우던 소철과 고무나무를 여전히 껴안고 이사를 마쳤다.

겨울이면 창밖에서 떨고 있는 소철과 고무나무를 마루 안으로 옮겨놓았다. 고무나무가 잎을 키워나가면서 동그랗게 말린 새 순이 자라나 흉터자국을 남기고 잎들은 떨어져 나갔다. 고무나무는 키가 커졌고 놀러온 사람들이 고무나무 가지치기를 해갔다. 그렇게 꺾어서 두면 새로 뿌리가 내려 자라난다고 했다. 새로 자라나는 고무나무도 여전히 이 집안에서 들려오던 기억들을 간직한 채 새로운 고무나무로 자라 날거라 생각했다. 가지치기를 한 뒤 또다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고 그렇게 자라난 가지는 또다시 누군가의 집에 꺾꽂이로 다시 피어났을 거라고. 오래된 잎은 떨어져 죽고 없어져도 새로운 기억이 그 고무나무에 새겨질 것이다.

동생은 학교도 멀리서 다녔고 또한 직장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녔다. 어느 순간 동생은 고무나무가 있던 그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마치 고무나무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지 않으려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서.

아들들은 다 제 부모에게서 멀리 떨어져 빙빙 돌면서 사는 거라오. 행성의 위성처럼 멀리서 서로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으면서 그러면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그 정도로 사는 거지라며 어머니의 뜨개 옷 친구들이 말을 해주었다.

마당에 놓인 파란 플라스틱 화분속의 그 고무나무는 자식들이 아주 멀어져 갈 때 늙어가는 어머니를 위로해주었다. 고무나무는 소철보다 부드러웠고 든든했을 것이다. 어느 집에서나 한 그루 정도 있을 법한 그런 나무였다. 행운을 가져오지도 않고 사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고무나무를 어떤 일로 나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불구덩이 같은 마음이었을 때 한 그루 작고 여린 고무나무가 함께 울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었다.

다음날 나는 진경을 대신해서 혼자 다시 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진경은 전화를 해왔고, 말을 머뭇거렸다.

갑자기 연락이 왔거든. 오늘 네가 혼자서 마무리 좀 해주겠니. 성당에 장례미사에 가야하거든.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어제 아는 분이 돌아가셨어. 그 분이 누구지? 진경은 머뭇거렸다. 이혼한 남편의 어머니. 그러니까 진경의 시어머니였다고 그랬다. 그래 가봐. 떠나는 이의 마지막 손이라도 만져 드리는 게 도리겠지.

지독한 여름이 지나고 구월이 오자 짙은 초록의 빛도 사그라 들고 말았다. 혼자서 열 군데의 건물을 조사하고 나면 삼주에 걸친 일이 끝이 난다. 혼자서 T동네의 주소록을 대조해 가면서 걸어 다녔다. 이 동네에는 새로 지어진 건물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 년 전의 건물대장표를 보다보니 일 년 사이 폐점된 작은 가게들이 꽤나 많았다. 조사대상 주소지와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간간히 이층이나 삼층의 영업장을 확인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셔터가 내려진 곳과 가끔 어두운 공간을 더듬어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사료창고 같은 곳에서 풍기는 묵은 곰팡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어찌하든 조사는 확실하고 재빨리 끝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건물들 사이를 지나간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오직 건물일 뿐이다. 오후 해가 어제처럼 엄청 느리게 지고 있었다. 어서 끝내고 저녁의 그늘 속으로 걸어가고 싶었다. 햇살은 너무도 오랫동안 눈을 찔러댔다. 나는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그리고 어제 그 폐허와 같은 건물로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동생을 만나지 못했고 언제 한 번 한국을 왔다가 갔는지 동생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그 애는 홀홀단신이라는 느낌이 새삼 들었다. 카페에서 차가운 레몬탄산수를 한잔 마시며 건물 대장 속 주소지에 줄을 그었다. 누가 확인할 것인가. 서류 속 건물이 실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아닌지. 그러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둑처럼 어떤 흔적도 없이 낡은 건물의 존재를 확인하러 다니는 일이 어쩌면 내게 참 적합한 일인 듯 했다. 동생을 찾아내는 일이 내게 절박하듯이.

후미진 골목의 끝 어제 그 낡은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쓰레기는 굴러다녔고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일층 입구에서 작은 인도 고무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푸석한 화분 속의 흙들이 고무나무를 겨우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들고 있던 생수병의 먹다 남은 물을 화분에 부어주었다. 흙 속으로 물이 스며드는 소리가 제법 컸다. 이곳을 떠난 이들은 화분에 키우던 나무를 버리고 갔다. 건물 안 우편함에는 아직 남은 사무실에 우편물이 몇 개 남아있었다. 이곳의 많은 사무실들 가운데 세 곳만의 이름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중국여행을 전문으로 한다는 작은 여행사와 비만전문 다이어트 물품을 파는 업체.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갑을통상이라는 무역회사 사무실이었던 자리였다. 누군가 이곳을 찾아온다면 보게 될 것은 갑을통상이 버리고 간 의자와 책상들, 서류뭉치와 빈 박스 그리고 또 화분 속에 남은 고무나무일 것이다.

모두 폐업이 된 곳이었다. 마치 불에 타서 모든 것이 쓸려나간 현장을 다녀가듯이 나는 닫혀진 사무실의 외관을 보고 난 후, 빈 복도를 지나 출입구로 다시 나왔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곳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고무나무가 궁금해졌다. 진경아, 너 고무나무 하나 데려다 키워봐라. 내가 며칠 뒤에 네게 가져다줄게.

진경이 휴대폰을 받지 않았기에 문자를 남겼다. 성당에서 치르는 장례미사에서 진경은 틀림없이 울고 있을 것이다. 진경의 시모는 치매가 들면서 진경이 이혼한 것을 잊어버리고 요양병원에서도 그녀를 찾곤 했다. 나이 들면서 시어머니도 먼 친척 당숙모처럼 애처롭게 여겨져. 내가 가끔 병원에 가면 그 늙은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게 보여. 다른 사람은 잊고 말았는데, 나는 왜 기억 속에서 남았는지 모르겠어.

그런 진경에게 저 인도고무나무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강아지처럼 사료도 들지 않고 고양이처럼 놀아주지 않아도 되고 그저 말을 건네고 방안에 들여서 키우면 되니까. 나는 그 건물의 모퉁이에 선 채 버려진 그 고무나무 화분을 들고 갈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닐에 화분을 감싸서 안고 걸어 나가 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 것이다. 건물의 복도 끝에 놓인 고무나무에서 눈물 같은 유즙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밤이면 고무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집에 고무나무를 가져다 놓고 그날 밤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임종을 떠올렸다.

동생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하루 늦게 도착했었다. 어머니의 임종도 입관도 보지 못했다. 그저 잠깐 장례식 마지막 날 도착해 염한 어머니의 모습 잠깐 보았을 뿐이었다. 애써 감정을 삭이느라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었다.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 표를 끊었지만 일본의 어느 공항 부근 숙소에서 하루를 체류하고 말았다. 그때였지, 아마 그 시간이었을 거야, 누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간이. 나는 그렇게 직감했어. 잠깐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거짓말 같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꿈결에서도 그때 그 순간 어머니가 떠나가시는구나. 내가 미안하지 않도록 여기까지 나를 만나러 왔구나. 임종을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도록. 그게 멀리 있어도 순간 느껴졌어.

동생이 말했던 그 말이 희한하게 떠올랐다. 여긴 비가 오고 있지. 나이지리아 아부자에도 비가 자주 올까. 너도 이곳에 내리는 비나 눈을 그리워하길 바란다. 너도 그곳 어딘가 외로운 방안에서 너를 위로해 줄 고무나무 하나쯤 키우고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거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왜 고무나무인지 물으면 그냥 이야기를 들어줄 넓은 잎사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라고. 네가 혼자이지 않고 네가 평화롭기를. 네 말을 들어줄 속 깊은 귀를 닮은 나무 하나면 족하니까 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건축물 조사 보고서를 다 완성하고 서류봉투에 자료를 넣었다. 되도록 빠른 시간에 조사를 완료했으니 내일은 서로 축하를 해야겠지.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묵묵한 이 고무나무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도 외로운 밤 고무나무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고무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순하게 귀를 기울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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