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성원자력본부의 창작오페라 ‘마담수로’.

성덕왕(聖德王)
제33대 성덕왕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 벼의 작황이 좋지 않아 백성들의 굶주림이 심했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는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하루 서 되(三升)로 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하여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 때의 일이라 한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 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 같이 바다를 둘렀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이 없는가?” 그러나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면서 모두 사양하고 나서지 못하였다. 이때 암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었는데 가사(歌詞)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뒤 이틀을 가다가 바다에 임한 정자(또는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의 용이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노인이 고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습니다. 이제 해룡도 축생인지라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계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다 속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한다.

“칠보궁전(七寶宮殿)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한 것이 인간의 연화(煙火)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 이상한 향기가 났는데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자태와 용모가 시대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가곤 했다. 이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水路)를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바치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다.

짙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이상은 성덕왕 시대의 특기할 만한 일을 일연선사가 기록한 것이다. 먼저 흉년에 임금이 나라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한 일을 말하고 다음은 수로부인에 얽힌 진기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대의 생활사와 오늘에 새길 교훈을 일러준다.

첫째, 태수는 물론 그 부인도 귀족으로 간주되어 사람들의 높임을 받았다는 것이요.

둘째, 귀부인이 여유 있게 종자들이나 길 가는 노인과 이야기하고 꽃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당히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유지하였다.

셋째, 철쭉꽃을 꺾거나 바다에 들어간 부인을 구하는 일이나 모두 노인의 도움이 있었다. 흔히 노인은 지혜롭고 관대한 존재로 여겨지는데, 신라시대엔 용감하고 날렵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노래도 잘 지었다. 신라의 노인은 풍류가 있었다.

넷째,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속담과 실제 대중의 합창으로 바다의 용을 겁박한 것은 대중 또는 여론의 힘, 그리고 소리의 공덕이 과연 대단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섯째, 신라 사람들은 곧장 즉석에서 시를 짓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생활화할 정도로 문학과 음악의 교양이 풍성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부인 이야기는 향가(鄕歌)도 두 수나 갖추고 있는 재미있는 소재다. 경상북도나 강원도에서 관광자원으로 추진함직한데, 꽃을 바치고 바다로 용이 나타난 장소를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어 망설이는 사이, 삼척군에서 ‘수로부인 헌화공원’을 조성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꽃을 꺾어 바치고 이틀을 더 가서 용의 변을 당했으므로 적어도 헌화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울진이나 영덕 등 경북지역일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