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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프로이트와 함께 심층심리학계를 대표하는 칼 융(C. G. Jung)은 이것저것 나누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를테면, 무의식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나누고, 인간의 심리기능도 사고, 감정, 감각, 직관으로 4등분 하고, 인간 유형도 영웅, 현자(賢者), 마법사, 반란자, 그림자친구, 장난꾼, 조력자, 문지기 같은 원형적 인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비교가 되어 장단점들이 쉽게 드러납니다. 융의 비교법으로 저 스스로를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마침 SNS에서 검사지(檢査紙)가 돌아다니기에 한 번 풀어봤습니다. 결과가 재미있습니다. 저는 직관적 사고형이면서 동시에 현자 유형의 인간이랍니다. 사지선다 객관식 문항 몇 개의 결과치고는 퍽이나 기특합니다(나이나 직업, 사회활동, 취미활동, 종교 같은 건 아예 묻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혼자 생각하기 좋아하는, 고집 센 늙은 선생이라는 게 금방 표시가 나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망상과 간청’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고형(思考型) 인간인 제게는 모든 생각이 한갓 망상(妄想)일 뿐입니다. 생각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망상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생각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가여운 존재입니다. 모두 병들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저를 대입해 봐도 그렇습니다. 안위(安危)에 대한 지나친 집착, 인간과 기계 등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의식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저를 공격하곤 합니다. 한때 의심도 했지만 역시 프로이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관련해서 종교의 효용과 가치를 생각해 봅니다.

...성 루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성모(聖母) 이콘(icon·聖畵)의 유형은 분명치는 않으나, 성모와 세레자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삼체 성상이라는 의미로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 좌우에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있다)에 나타나는 성모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하기아 소피아 사원의 13세기 모자이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청(entreaty)’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이시스 유형의 이콘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유형은 이콘 파괴 논쟁이 종료된 9세기 말 이후에야 나타나는데, 성모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의 첫 번째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콘이 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덕형, ‘이콘과 아방가르드’’

책에서 ‘간청(懇請)’이라는 말을 보니 10년 전쯤에 있었던 제 경험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 잠시 가졌던 신앙에 큰 미련을 두고 종교에 대한 ‘사고(思考)’만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지인의 혼사에 참여했습니다. 아파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담한 성당이었는데, 혼배미사 중에 위층 성가대 자리에서 들려오는 자비송(慈悲頌)에 한 방 맞았습니다. 낮게 깔려서 저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그 간절한 인간의 ‘간청’이, 저의 심금을 크게 울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간청’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생각, 온갖 집착, 온갖 욕심을 버리고 그저 신에게 간청하는 일, 자비를 비는 일, 그것만이 인간이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습니다.

문득, 발칙한 생각 하나가 들어옵니다. 망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성을 증거하는 세상의 모든 이적(異蹟)들은 결국 ‘간청’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자비와 동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간청’이 있는 한, 설혹 인간의 집착과 욕심이 때로 몹쓸 장면을 만들어내는 일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끝까지 옹호되어야 할 인간적인 가치와 규율(規律)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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