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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춘추(春秋)’ 노 정공 10년조의 기록이다. ‘여름, 공(公)이 제후(齊侯)와 협곡에서 만났다. 공이 협곡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과 환과 귀음 땅을 돌려줬다’

공은 노 정공인데 노나라 임금의 벼슬은 공작(公爵)이다. 제나라는 후작의 나라이므로 제후(齊侯)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통상 제 경공이라 부른다. 공자의 협곡회담은 상당히 유명하며 그의 명성을 드높인 사건이다. 춘추말(春秋末), 제 경공은 명군이었고 제나라는 강성했다. 당시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진(晋), 초(楚), 제(齊) 정도였고 노나라는 약소국에 속했다. 제나라의 제의로 협곡이란 곳에서 두 제후가 회담을 가지게 되었는데, 공자가 이 대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강맹한 제나라 위세에 눌리어 제나라는 그냥 회담장에 나가려 했으나, 공자는 군주가 외국에 나가는데 병거(兵車)의 호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제나라는 무력을 숭상하는 강국이라 우리도 준비가 없을 수 없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회담장 외곽에 배치시켰다. 노나라를 무시한 제나라는 회담이 시작되자 방자한 괴상한 옷을 입은 무용수들을 시켜 춤을 추게 하고 노나라 임금을 겁박하여 체포하려 하였다. 이때 공자가 나서서 제나라 관리를 꾸짖어 물리치고 군후들의 회동에 오랑캐의 춤을 추며 무력을 쓰려한다며 제 경공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경공이 사과하며 자리를 정돈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엄숙하고 올바른 언행과 노나라 군대의 위용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표시로 전일에 빼앗았던 노나라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제나라 입장에서, 이 회동은 원래 회담이라는 핑계로 노나라 임금을 겁박하려던 계획이었는데, 공자의 의엿한 태도와 조리 있는 발언, 그리고 노나라 병력의 호위에 꺾여, 체면을 깎이고 땅까지 돌려주는 거래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위급순간에 얼떨결에 약속한 것을 지켜 토지를 반환한 제 경공의 신의(信義)가 높은 평가를 받은 사건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 초 회왕은 초나라를 침략하여 큰 피해를 입히는 진 소양왕이 이제는 적대행동을 그만하고 만나서 동맹을 맺자고 하니, 덜렁 좋다며 출동하였다. 굴원(屈原) 같은 우국(憂國)의 지식인이 한사코 반대하였으나, 진(秦)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진나라 땅 무관에 들어갔다가 함양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 때는 병거(兵車)를 대동하였으나, 남의 나라 땅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송 양공이 인의(仁義)를 내세우며 제후들을 규합하려다 되려 초나라에 걸려 들어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은 적도 있다.

역사는 만세의 교훈이요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다. 공자는 명실에 바탕한 도의와 윤리가 추락하고 인륜이 무너지는 세태를 바로 잡고 군신이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하게 하려고 ‘춘추’ 1만6500자를 지었다. 역사서에는 유명한 ‘전국책’,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 많은 종류가 있는데, 한결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 책들은 개인이나 가정, 국가에 대하여 매사 다가올 일을 예측하고 그 대비를 확실히 할 것을 곳곳에서 주문하고 있다. 외교에 있어서, 제 환공이 회맹에 병거를 대동하지 않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이미 패권을 성취한 이후의 일이다. 일반 국가가 외국과 상대함에는 병력이 항상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평화주의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공자가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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