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쟁탈전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유교적 이상향 실현할 마음의 고향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한 송학서원 전경

청송군 안덕면 정전리의 송학서원(松鶴書院)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를 배향, 선현의 어진 뜻을 기리고 있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에게 있어 청송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퇴계의 생애와 학문적 깊이에 관심을 가진 이를 제외하고는 퇴계와 청송의 인연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퇴계가 안동 출신의 유학자로만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조선 중기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동방의 주자’라 불릴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고 성리학을 조선 실정에 맞게 재편한 인물이다.
 

송학서원 현판

퇴계가 토착화시킨 성리학은 향후 조선 500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묘사화(1519) 등의 정치분쟁은 조선의 대학자마저도 중앙정치 무대를 떠나도록 만든다. 수많은 선비가 목숨을 잃으며 수난을 당했고 퇴계 역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한 퇴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청송이 자리 잡고 있었다. 퇴계가 48세 되던 해 외직을 구해 청송부사로 나가려 했던 일은 청송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한다.

퇴계가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시골 현읍으로 내려가고자 했던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던 꿈을 펼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자연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퇴계는 아귀다툼과 같은 권력쟁탈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 했고 유교적 이상향을 실현할 실험무대로 청송을 택했다.

학문을 닦고 인간의 도리를 밝히려면 청송만 한 곳이 없었다. 또한 청송은 퇴계의 입향조가 가문을 시작한 곳으로 진보(진성)이씨의 본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당입구 현판

퇴계가 외직을 원한 데는 아픈 가족사도 한몫했다. 퇴계는 21세 때 부부의 연을 맺은 허씨를 결혼 6년 만에 잃고 만다. 3년 후 다시 연을 맺은 두 번째 부인 역시 마음의 병을 얻어 재혼 16년 만에 사별한다. 이 때문에 퇴계는 마음의 안식처가 절실했다. 하지만 외지로 가려던 퇴계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그친다. 외지로 벼슬을 나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청송이 아닌 단양군수로 제수됐기 때문이다. 이때 단양군수로 제수돼 임지로 떠나던 퇴계는 시 한 수를 남긴다. 시에는 외직으로 떠나는 기쁨과 함께 청송으로 가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나 있다.
 

송학서원 동재인 직방재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 선생 유교진흥 인정 위패봉안.

송학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고 안덕 당저(堂底)의 외가에 태어난 학봉 김성일 선생과 임진왜란을 피한 여헌 장현광 선생이 유풍(儒風)을 진작하고 유교 진흥에 많은 공이 있다고 해 청송 유림들이 조선 숙종 28년(1702)에 당저(현 명당3리)에 세우고 세 분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청송을 돌아보며 ‘청송백학수무분 벽수단산진유연’(청송의 백학은 비록 연분이 없어도 벽수의 단산에는 인연이 있나 보네)이라고 읊은 싯 구 중 ‘송’과 ‘학’자를 따서 송학서원이라 명명했다. 이후 매년 봉향(奉享)하며 후학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다가 현 위치로 이건했으나 이건 년대는 알 수 없다. 고종 5년(1868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송학서당’으로 사용해 오다가 1996년 유림들이 의논해 ‘송학서원’으로 개칭했다.

송학서원 졔례

명당리의 동쪽 길안천변에는 너른 가람들이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한길 가에 다소 휑뎅그렁하게 서 있는 송학서원 이정표를 따라 샛길로 들어서면 그제야 들은 흔연히 제 모습을 펼쳐 보인다. 둘러선 산줄기는 멀고 들은 세상에서 가장 너른 호수처럼 잔잔하다. 마을은 장전리 창말. 옛날 안덕면의 식량 창고가 이곳에 있었다.
 

별도의 담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존덕사에는퇴계 이황,학봉 김성일,여헌 장현광 선생의 위폐가 봉안돼 있다.

△1568년 송학서당이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서원으로 .

송학서원은 들의 선두에 낮게 자리한다. 동쪽을 향해 선 외삼문의 양쪽으로 긴긴 담장이 뻗어 나가 서원을 크게 감싸 안고 있다. 삼문 앞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꼬장꼬장하면서도 장려하게 솟아 있다.

남쪽 담장 밖에 주사 건물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근래의 것인지 산뜻하다. 주사 뒤 담벼락에 나 있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면 반듯하고 넉넉한 공간이 펼쳐진다. 경역 안에는 강당과 사당, 동서재가 질서 있게 자리하고 있다.

송학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집이다.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있고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다. 동재에는 직방재(直方齋), 서재에는 존성재(存省齋)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정연한 4개의 방에 툇마루가 있는 엄격한 얼굴이다. 별도의 담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존덕사(尊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송학서원의 모든 맞배지붕은 박공면 판자 끝 부분이 간결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소소하나 눈에 띄는 공력이다.

송학서원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188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180여 년간 송학서원은 삼자현 이남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 육성과 유림 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유림은 서원을 서당으로 격하시켜 보호했다.

송학서당이 다시 서원으로 격상된 것은 1996년이다. 사당은 2010년에 건립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송학서원을 지키려는 유림의 안간힘이 서원의 정신이다. 그로 인해 완전하게 구현된 서원의 오늘이 과거를 압도한다.
 

이창진 기자
이창진 기자 cjlee@kyongbuk.co.kr

청송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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