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바로세우려 헌신한 고려말 충신의 정신 깃든 곳
△ 백문보 행적
백문보(白文寶·1303∼1374년)는 고려 말 명신, 자는 화보(和父) 호는 담암(淡庵) 또는 동재(動齋), 당호는 보인당(輔仁堂),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또한 공민왕은 그와 의견이 다르지만 그의 인품이 공명정대하고 충신이었기 때문에 정사를 맡겼으며 홍건적의 난을 수습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를 재건하기 위해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그 중책을 선생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쟁으로 소실된 전적들을 복구하면서 불교식으로 된 의식과 제도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그가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려를 새롭게 하고자 한 인물로 후대에 평가를 받았다.
1363년(공민왕 12)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8월 경연에 나아가 종일토록 공민왕을 모시고 이제현, 이능간, 허백 등 15인이 강론을 하였는데 특진으로 관료직의 가장 청직인 광정대부 정당문학(匡靖大夫 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제현과 이곡, 이색이 불교에 대하여 관대한 반면 백문보는 인사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최해의 척불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로 인해 정당문학 이상의 관료로 승진을 못한 이유로 볼 수 있다.
1369년 고려의 국운을 예견한 듯 충청도 직산의 토지를 정리하고 경상도 영해부(현 영덕군 영해면)으로 낙향하였으며 여러 자식에게 관직에 나가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1373년(공민왕 22) 세자 우(禑)의 스승으로 전녹생, 정추와 함께 임명되었으며, 1374년 12월 향년 72세로 졸하니 우왕이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내렸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 상향 축문에는 ‘斥邪衛道 納約匡君 屹爲砥柱 起我後人’,‘사도를 멀리하고 정도를 보호하며, 군주을 바르게 인도하고, 주초를 확고히 세워, 후세 사람을 일깨우라’기록돼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휘하에서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온 전력을 다하였으며, 1609년(광해 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에 올랐으나, 더 이상 과거와 벼슬에 대한 뜻을 갖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연을 벗하여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운산서원은 1812년 건립된 후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과 백문보, 백현룡을 제향하는 유교 공간으로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되었으며, 현재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