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매원 거닐던 선비는 간데없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네

위에서 내려다본 회연서원 전경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조선 중기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낙동강 상류 지역의 퇴계 이황과 낙동강 하류 지역의 남명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가 그들의 성리학과 사림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영남 남인계 예학을 집대성하고 목민관을 거친 곳마다 지방지를 편찬하는 등 경세학 방면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그의 학문적 성과는 근기지역 퇴계학맥으로 이어져 경세치용의 실학으로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강의 경력에 있어 주목되는 것이 관직 대부분을 지방 수령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그는 가는 지역마다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 강학 하는 등 학자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령을 지낸 고을마다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는 등 전국 18개소의 서원에 제향됐다.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회연서원은 전국에 산재한 한강을 제향한 서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서원으로 사액서원이기도 하다. 서원이 건립된 장소도 그가 한때 학문을 닦고 강학하던 회연초당이 있었던 장소이다.

△회연초당에서 회연서원으로.
회연서원 현판
회연서원은 1583년(선조 16) 한강이 제자를 기르기 위해 건립한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한강은 그의 선영이 있는 창평산 한강(寒岡)에 정사(精舍)를 지어 10여 년 동안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찾고 이에 따른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자신의 학문적 성숙은 물론, 문인들의 결속 및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강학 활동을 위해 정사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초당을 건립하였다. 두어 칸 규모로 건립한 초당의 이름을 회연이라 한 것은 여러 설이 있는데, 초당의 배경이 된 봉비암(鳳飛巖)이 대가천변에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 회오리처럼 도는 깊은 소가 ‘회연(回淵)’이며 이것이 후에 ‘회연(檜淵)’으로 바뀌었다는 설과 회나무가 연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회연(檜淵)’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후 회연초당은 한강의 사후 2년 뒤인 1622년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서원으로 건립하기 시작하여 1627년 준공됐다. 1690년 사액도ㅑㅆ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대부분 건물은 철거됐으나 유일하게 강당만은 보존되었다. 이후 강당을 활용하여 ‘회연서당(檜淵書堂)’으로 한동안 유지하였다. 이후 1974년 정부의 보조와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복설했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돼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기다.

근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되어 3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으로 낙찰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 ‘회연서원(檜淵書院)’은 회연서원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서원 앞에 수직으로 솟구친 바위산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전국의 구곡 가운데 영남을 대표하는 구곡인 무흘구곡 제1곡 봉비암(鳳飛巖)을 표현하였다. 물론 그림과 같은 위치에 회연서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 바위가 그렇게 솟구쳐 생기지도 않았지만, 겸재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게 할 만큼 경관이 좋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강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겠다.

회연서원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으로는 1784년 영재(嶺齋) 김상진(金相眞)이 그린 ‘무흘구곡도첩(武屹九曲圖帖)’ 제1곡 봉비암도(鳳飛巖圖)가 있다. 봉비암도에는 봉비암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던 회연서원의 옛 모습이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 회연서원의 입구에는 무흘구곡 표지석을 비롯해 김상진이 그린 무흘구곡도와 한강의 후손 경헌(警軒) 정동박(鄭東璞)이 지은 구곡시를 9곡별로 담은 표석 등이 세워져 있어 찾는 이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른 봄 백매원(百梅園)으로 오세요.
한강 선생이 회연(檜淵) 앞에 초당을 마련하고 매화 1백 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른 봄이면 만발한 매화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매화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각지의 야산이나 평지에서 자라나기도 하고, 또 선비의 집 뜰에 식재되어 관상용으로도 쓰이던 나무이다. 매화는 맑고 밝은 꽃과 깊은 꽃향기 때문에 선비나 화가들의 시·서(글)·화(그림)에 늘 등장할 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무엇보다도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워 봄을 먼저 알려주기에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의로운 선비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이렇게 지조와 절개 그리고 충성을 상징하는 나무인 매화나무는 혹한에도,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므로 문인들이 시나 그림의 소재로 즐겨 사용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두고 감상하기를 즐겨 하였다.
근래에 알려진 겸재 정선의 회연서원 그림
죽음을 앞두고 “저 매화에 물을 줘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남다른 매화 사랑을 보여줬던 퇴계 이황처럼, 그 학맥을 이은 한강도 매화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한강은 회연초당을 건립하면서 초당의 마당에 100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하였다.

회연서원 백매원의 매화는 서원에 식재된 매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매화나무로서 지금도 이른 봄이면 만발한 매화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변변찮은 산 앞에 자그마한 초당이라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나네.

게다가 구름 냇물 그림같이 꾸며 주니

세상에서 내 생애 누구보다 호사롭네.



제회연초당(題檜淵草堂)‘한강집’ 권1.



위의 시는 한강이 지은 회연초당과 백매원을 노래한 시의 하나로 학문도야와 강학의 장소로 소박하게 두어 칸으로 마련한 회연초당에 안분지족하는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원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

한국 서원 건축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교육 시설로서의 강학공간과 선현의 제향을 위한 제향공간, 그리고 제향과 강학 기능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지원공간으로 크게 나뉘며, 건물의 배치 형태는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을 앞쪽에 두고, 제향공간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회연서원은 이러한 전형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강당을 중심공간에 배치하고 동북쪽 뒤로 사당을 배치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근래에 들어 서원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새로운 건물을 건립하는 과정에 현재의 배치를 갖게 되었다.

특히 회연서원의 강당은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건물이자 중심건물로서, 2015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종도리 상량문에서 1622년 건립하고 1896년에 중건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부재의 치목이나 결구수법 등에서 고식의 기법을 확인할 수 있어 건축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그 규모가 크다. 강당의 구조는 조선 중기의 건축수법과 구조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당 배면 창호의 구성에 있어 중간설주가 사용된 영쌍창과 창호의 문얼굴에 사용된 연귀맞춤 등은 18세기 이전의 건물에서 확인 되는 고식의 기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회연서원의 강당은 창건과 상량문의 기록적 근거가 정확하고 건물에 사용된 고식의 건축수법과 구조, 양식 등으로 볼 때 조선 중기 건축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 한강 정구
한강 정구 영정
한강은 자를 도가(道可), 호를 한강(寒岡)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영남 유학의 두 거두인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1573년(선조 6)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방의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하였고 그 후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의 육성에 전념하였다.

한강은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한강집(寒岡集)’,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심경발휘(心經發揮)’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렸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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