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와 행복만 가득한 60년만의 황금돼지해

불국사 극락전 황금돼지
황금 돼지의 해가 밝았다.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으로 육십갑자의 36번째의 해다.

10개의 천간 중 ‘기’는 땅, 즉 황금빛을 의미하며 ‘해’는 돼지를 뜻해 올해는 ‘황금 돼지의 해’라고 불린다.

무술년과 기해년 등 해마다 달라지는 이름이 붙여지는 기준을 알기 위해선 10간(천간)과 12지(십이지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나뉜다.

옛 중국에서 유래한 10간은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 국가들로 전해져 여러 용도로 쓰였다.

전근대에는 연도와 날짜 등 시간을 표시하는 데 쓰였고 현대에도 순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관용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12지는 출생년도를 ‘띠’로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

12지는 ‘자(쥐)·축(소)·인(호랑이)·묘(토끼)·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로 구성돼 있다.

한반도가 신라와 발해로 나뉘었던 남북국 시대에 경주의 괘릉(掛陵)이나 김유신 묘(金庾信墓) 등 능묘의 호석(護石)에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 처음 12지가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위의 10간과 12지를 합치면 ‘60간지(육십갑자)’가 완성된다.
불국사 극락전 황금돼지
육십갑자의 처음부터 각 순서대로 조합해보면 ‘갑자(1984년)’, 을축(1985년)을 시작으로 무술(2018년), 기해(2019년)…임술(2042년), 계해(2043년)까지 총 60가지 조합으로 이뤄지며 60년마다 한 번씩 육십갑자가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난 황금 돼지의 해는 60년 전인 1959년인 셈이다.

종종 ‘2007년에도 황금 돼지해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난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정(丁)은 화(火)에 해당해 엄밀히 말하자면 그해는 ‘붉은 돼지의 해’였다.

다만, 중국에서는 ‘납음오행’에 기초해 정해년을 황금돼지해라 부르는 것이 다소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대한민국 기준으로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였고, 2019년 기해년이 정확한 ‘황금 돼지해’다.

올해는 풍요를 상징하는 ‘황금’과 ‘돼지’가 함께 어우러진 해라 행운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특히 60년 만에 돌아오는 기해년을 맞아 ‘더 풍요로워질 삶’을 소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합계출산율이 1.0명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지금, 황금돼지띠 열풍이 불어 잠시나마 출산율에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실제로 지난 돼지해였던 2007년의 출생아 수는 49만6822명으로 전년 대비 9.9% 증가했다. 출산율 감소 추세에서 이례적인 증가폭을 보였다.

‘백호의 해’로 불린 2010년에도 출생아 수는 전년 대비 5.6% 증가한 47만171명을 기록했다.

또, 흑룡이었던 2012년에는 출생아 수가 48만4550명까지 치솟기도 했다. 상술이라는 비판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띠’가 출산율에 영향을 미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9년 황금돼지의 해 연하우표 발행
한편 2018년 7월까지 연간 출생아수는 전년대비 8.6% 감소한 19만8700명이다. 보건복지부는 연간 출생아 수가 32만명대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연간 출생아가 가장 적었던 해는 2017년의 35만7771명이다.

기해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재운이 뛰어나고 복을 지닌다는 속설이 있어 이에 맞춰 2019년에 임신과 출산 여부를 결정하려는 여성들도 많다.

요즘 예비 엄마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 등에는 2019년생 황금돼지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임신시한이 언제인지를 묻거나, 내년이야말로 2007년보다 더 진짜 황금돼지띠 해라는 주장, 2019년생 아이를 갖게 됐다고 자축하는 글들이 자주 보인다.

유통업계에서도 ‘황금 돼지 특수’를 이용한 마케팅을 통해 관련 소비 증대를 기대하며 여러 행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한편,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기해년’에도 큰 자연재해와 역사적인 사건 등이 있었다.

60년 전 민족 대명절 추석 당일이었던 1959년 9월 17일, 경남 창원시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를 태풍 사라(Sarah)가 할퀴고 지나갔다.

당시 사라의 최대 중심 풍속은 초속 85m, 평균 초속 45m, 최저 기압은 952hPa을 기록했는데, 이는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역대 3번째로 큰 인명 피해를 남겼고 종합적으로 비교해 볼 때 규모가 가장 큰 태풍으로 기록됐다.

한국전쟁이 이후 전국이 폐허가 된 상황이라 이를 대처할만한 방재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엄청난 폭풍우를 동반한 태풍에 많은 사람이 삶의 기반과 터전을 빼앗겼다.

피해 규모는 전국적으로 사망 781명, 실종 206명, 부상 3001명 등 3988명의 사상자와 37만345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또, 6000동의 건물이 피해를 입고 피해 경작지 약 15만㏊의 경작지를 비롯해 3800개소의 도로가 유실됐고 1만1704척의 선박이 파손되는 등 총 1900억 원(1992년 화폐가치 기준)의 재산 피해를 남겼다.

또,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419년(세종 1년)에는 대마도 정벌을 통해 약탈을 일 삼던 왜구를 무찌르기도 했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위치해 중개역할을 했다.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한 대마도 주민들은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쌀을 받아 갔다.

더구나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이의 일본은 국내의 내란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라 몰락한 무사와 농민 등 빈민이 증가해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해 정벌에 나섰다.

병선 227척과 1만7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도착해 2000여 채의 가옥을 태우고,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거나 불태웠다.

그 결과,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들은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에서 약탈보다는 평화적 임무를 갖고 왕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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