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충절 지킨 '일편단심' 포은의 기상 오롯이
최근 출간된 ‘해와 달의 빛으로 빚어진 땅 오천, 마을과 사람들 이야기(이상준·임성남 공저)’와 오천서원지 등에 따르면 오천서원이 건립된 고장인 오천 지역은 포은 선생과 인연이 매우 깊다.
포은의 본관이 오천인데,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영천 임고(臨皐)로 알려지고 있다.
영천과 오천을 모두 포은 출생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문헌에서는 영천을 고향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승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의 시조(東方理學之祖)로 격찬받을 정도로 높은 학문 성취를 이뤘고, 명과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을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고,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 법률 체계를 재정비한 정치가다.
시문에도 뛰어나 유명한 ‘단심가’ 등을 남기며 다방면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고려의 마지막 거인’이었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두 번의 3년 상을 모두 치른 효자의 면모도 빼놓을 순 없다.
1392년 조선 건국 직전,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건국 후 권근의 상소로 태종 원년(1401년) 포은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새 나라 기반을 다지고 있는 조선으로서도 정몽주같이 조선을 위해 ‘의리’를 지킬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종 연간에 권진의 상소로 문묘(文廟)에 배향됐고, 포은을 배향하는 서원도 각처에 건립되기 시작했다.
임고서원이 1553년 영천에 창건된 것을 시작(사액은 1555년)으로, 관직 생활을 한 개성에 세워진 숭양서원(1573년 사액), 묘소가 위치한 용인 충렬사(1576년 사액), 1588년 오천서원 등 13곳에서 잇따라 세워졌다.
오천서원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일 사림의 발의로 1588년(선조 21년) 선대 옛 거주지인 현 오천읍 구정리(당시 청림)에 건립됐다.
정습명은 영일 정씨의 시조다. 포은은 형양의 11세손이다. 정습명은 김부식(金富軾)·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홀로 사직하기도 했고, 주로 간관직을 맡아 임금 잘못을 간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다.
서원 소실 이후 다행하게도 양 위판(位版)을 운제산 만장암 굴에 모셔 보존했다.
다만 현종~숙종 연간인 1652~1683년 즈음 지금 자리인 원동으로 이건한 것으로 몽암 이채공의 고유문으로 추정된다.
이전 이유는 원래 구정리에 세워진 서원에는 장소가 협소했고, 터가 낮은 지대여서 앞에 흐르는 냉천이 수시로 범람해 홍수가 져 수해를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725년 사림 상소를 한 결과 1740년(영조 16)에 설곡(雪谷) 정사도(鄭思道)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별묘에 배향했다.
정사도(1318~1379)는 고향이 연일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모친상에 3년간 시묘한 효성에 감탄한 공민왕으로부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됐다.
최영의 제거를 꾀하는 신돈을 반대하다 파직됐으나 다시 복직돼 우왕 때 평리상의(評理商議) 등을 역임했다.
오천군(烏川君)에 개봉(改封)되고 공신이 된 인물이다.
정철(1536~1594)은 본관이 연일이며 호는 송강(松江)이다.
12세 되던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윗대 선현들의 고향인 영일(迎日)로 유배됐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영일의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관동별곡 등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당대 서인의 영수로 원칙과 소신을 강조했다. 4명 모두 연일 정 씨이지만 형양과 포은은 지주사공파, 설곡과 송강은 감무공파이다.
원리로 옮겨 지은 서원의 위세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조인 1676년 11월 비변사에서 왕에게 올린 병조의 계(啓)로 보면 당시 예안의 도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현풍 도동서원 등과 함께 연일의 오천서원은 전부 종사(從祀)한 제현(諸賢)이 평생 거처하던 곳에 세운 서원들이므로 왕실 차원에서도 이 서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천서원은 고종 연간인 1870년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구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영일현감 정모 씨는 송강의 후손이었는데, 그 선조가 서원 별묘(別廟)에 봉안돼 있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사액서원임에도 전체 서원을 훼철토록 뒀다고 한다.
훼철 후 35년 만인 1905년 묘우 자리에 위판을 묻고 받듯이 세워 놓고 오천단소(烏川壇所)라 칭하고 매년 춘추향사를 받들었다.
안타깝게도 1916년 관리인의 부주의로 불이 나서 전소 돼 서책과 고증할 문적(文籍)도 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