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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오는 ‘착한 목자(牧者)’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신약 성경에 기재된 예수의 비유 중에서 가장 문학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계산법이 아예 무시되는, 절대적 경지인 ‘길러주는’ 사랑의 세계를 그렇게 핍진(逼眞)하게 (대상이 유목민들이라는 것을 감안해) 설명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의미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일 것입니다. 인간이 티끌만 한 우주의 먼지로 태어나서 그저 쓸쓸하게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필연의 결과이며 천지를 창조한 조물주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종교는 가르쳐줍니다. 착한 목자의 비유는 그러한 종교적 가르침을 쉽고 감동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아시다시피 예수는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이 그 본을 보이고 제자들에게 따라 할 것을 권했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사랑은 매우 낯선 것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놓는 이타적인 사랑을 그는 강조했습니다. 사랑을 할 때는 그렇게 이해타산 없이 맹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착한 목자의 비유는 그 맹목적인 사랑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목자든 부모든 창조주든, 무릇 길러주는 자들은 결코 ‘계산’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설파한 것입니다. 양을 기르는 것이 주업인 유목민들은 양 한 마리가 그냥 재산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피를 나눈 자식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린 자식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안위(安危)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 착한 목자의 비유가 지닌 함의였습니다. 예수는 그 이야기를 그냥 전달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 착한 목자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세속적인 저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 복된 시대의 정치가들이 생각납니다. 모두 착한 목자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아직도 자기가 기르는 양을 그저 가죽(양털)과 고기로만 보는 목자도 많습니다. 양을 기를 때도 ‘99:1’의 원칙을 항상 지킵니다. 위기 상황이 오면 한 마리는 예사로 버립니다. 길 잃고 우는 어린 양의 울음소리를 외면합니다. 물론 ‘착한 목자’도 있습니다. 자신과 당파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지 않고 나랏일을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다수가 아니라 여전히 소수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받는 어린 양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든 국민이 내 편 네 편 없이 착한 목자의 따듯한 보살핌을 받는 사랑의 나라에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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