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그들은] 박희락 독립운동가 후손 박동욱씨 인터뷰
[애국지사 그들은] 박희락 독립운동가 후손 박동욱씨 인터뷰
  • 전재용 기자
  • 승인 2019년 02월 26일 22시 18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2월 27일 수요일
  •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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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부터 신사참배거부까지…아버지 신앙 큰 힘 된 듯"
▲ 독립유공자 박희락 씨 아들 박동욱(95) 씨.
“우리나라 역사상 남녀노소, 지역, 신분의 차별 없이 단결한 것은 3·1 운동뿐입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 목표를 위해 일어섰던 3·1 운동 정신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경북 영덕군 영해읍 장날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인 독립유공자 박희락(1882년 11월 14일∼1967년 1월 16일)의 아들 박동욱(95) 씨가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소회를 밝혔다.

20년이 넘도록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그는 3·1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 씨는 “한국이 일본의 통치하에 조용히 있었으면 독립과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 평화적인 3·1 운동이 세계 여론을 흔들었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카이로선언에서 한민족을 반드시 독립시켜줘야 한다고 보장받은 것도 3·1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박희락 씨에게 1991년 8월 15일 애국장을 수여했다.
박희락은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3000여 명의 군중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인물이다. 당시 경찰주재소까지 달려가 일본 경찰들의 무기를 빼앗아 무력화시키는 등 맹렬한 만세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일본의 대대적인 단속에 체포돼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4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 씨는 아버지가 받은 판결문을 조용히 내밀었다. 한자로 적힌 판결문에는 영해지방 만세운동으로 일본인 재산 피해가 발생, 1377원을 배상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3·1 운동 당시 경찰주재소를 부순 대가였다. 박 씨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상상도 못 한다. 당시 소 한 마리가 5원이었다”며 “가산이 몰수당했고 압류딱지가 붙었다. 집안사람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갔지만,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박 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산 것에 대해 학식과 애국심, 그리고 신앙을 간직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3·1 운동부터 신사참배거부까지 굳건한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80년 전 들었던 이야기다.

박 씨는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를 해 8세 때부터 16∼17세들과 함께 학문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일찍 배움의 길로 들어선 만큼,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르신들이 무시당하는 일제의 식민생활을 못 견디고 고향을 떠났다가 안동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앙을 가지면서 고충도 많았다. 박 씨는 “아버지가 신앙을 가지면서 집안에서 거의 배척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며 “당시 양반 집안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 기독교도를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했다”고 전했다.
3·1 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박희락 씨가 대구형무소에서 읽었던 기독교 서적.
하지만 영해읍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신앙 덕분이었다. 박희락은 선교사 등으로부터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을 전해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양반이라는 출신을 바탕으로 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을 거듭해 모든 고향 사람들을 한뜻으로 모을 수 있었다.

박 씨는 “당시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이 있을 때였는데, 아버지가 나서서 모두를 설득해 3·1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며 “이 모든 것이 어릴 적 배운 학문과 애국심,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4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박희락을 비난했다. 독립할 수 있다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는데, 함께 한 이들이 죽거나 매를 맞는 등 고통만 겪었다는 것이다. 박 씨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그는 “옥에서 나온 후에 박대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운영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았다”며 “아버지에게 감히 이야기를 못 했지만, 돈도 없고 우리 집도 어려운데 남을 돕는 그 모습이 어린 시절엔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박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거운 사람’이다. 말수가 적고 풍기는 기운 또한 강해서 평소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만세운동부터 신사참배거부까지는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은 것보다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귀동냥으로 더 많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행적과 삶을 존경하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 전까지 겪어야 했던 모진 수모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신앙을 가진 후 영해지방에 최초의 교회(원황교회)를 설립하고 민중계몽운동에도 전력했었다”며 “해방까지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보면, 내가 아버지처럼 살 수 있었는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대구지방보훈청이 지난 15일 박동욱 씨 자택을 찾아 독립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박 씨는 조선정치학관(현 건국대학교)을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공채에 합격해 교직원으로 근무했다. 이어 1984년 9월 정년퇴직을 했고 이후에는 광복회 대구지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퇴직 후 몇 개월 후에 광복회에서 연락이 왔다”며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부른 것 같아 열심히 활동했고 사무국장과 지부장까지 할 수 있었다”고 웃음을 지었다.

최근에는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진행한 3·1 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날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만세삼창을 나서서 외치고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된 독립유공자를 찾아 참배했다.

박동욱 씨는 “우리는 3·1 운동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며 “해방이 안 됐으면 역사도, 언어도, 민족도 사라졌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100주년은 이러한 역사를 다시 한 번 깊게 되새기는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며 “후세에도 3·1 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기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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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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