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그들은] 심산 김창숙 독립운동가 손자 김위 인터뷰
[애국지사 그들은] 심산 김창숙 독립운동가 손자 김위 인터뷰
  • 권오항 기자
  • 승인 2019년 02월 28일 21시 52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3월 01일 금요일
  • 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 유지 이으며 나라·사회에 헌신
▲ 심산 김창숙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의 사도실 마을은 의성김씨인 김계손(金季孫)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된 이후 현재까지도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같은 성을 가진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리고 마을의 가운데쯤에는 실천하는 선비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진 심산 김창숙이 나고 자란 생가가 있다.

생가는 사각형의 토석담 내에 안채와 사랑채, 장판고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1879년(고종 16) 7월 10일(음)에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전하기로는 선조로부터 오랜 세월 살아온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안채는 1901년(광무 5)에 다시 건립한 것이라고 하며, 사랑채는 1991년에 복원하였다.
심산이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립 성명학교로 사용했던 청천서당
생가는 근래까지 심산의 며느리인 손응교 여사가 지키다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비어 있다. 이웃에 살면서 집을 관리해 주고 있는 어른의 말로는 심산 선생을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생가를 찾아와 선생에 대해 물을 때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선생과의 옛일을 말씀해주시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어른은 특히 구순을 넘긴 연세임에도 당당하고 형형한 눈빛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한 한 집안을 꿋꿋하게 지킨 꼿꼿함을 보여주었던 손 여사를 기억하며 이제는 뵐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비어 있는 심산 김창숙 생가 안채
△‘실천하는 선비정신의 표상’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심산 김창숙(1879∼1962)은 자는 문좌(文佐), 호를 심산(心山)이라 하였으며, 일제의 감시 아래 한때는 우(愚)로 개명하였고 일제의 고문으로 다친 뒤에는 앉은뱅이를 뜻하는 벽옹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심산은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향리에서 대한협회성주지부를 조직해 계급타파를 부르짖는 등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매진하였다. 또한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1909년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해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으로 2019년인 올해가 그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7년 중국 망명 중 일경에 검거돼 국내에 송환,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한 두 다리 마비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 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섰으며,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을 설립해 초대 총장(總長)을 역임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한국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 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된 적이 있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이승만 정권과 투쟁하였다.

심산은 전 생애를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 교육진흥에 힘쓴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의 제단에 두 아들을 내어 놓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그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희생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산의 가족도 또한 그러한 희생을 치렀다. 심산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이 모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장남 김환기(金煥基·1908∼1927)는 심산이 베이징에 망명 중일 때 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자금 사정으로 곧 귀국하였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고문과 병이 겹쳐 사망하고 말았다. 차남 김찬기(金燦基·1915∼1945)는 1928년 1월 17일 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업을 주도하여 1929년 11월에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왜관으로 옮겨 청년연합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2월 이른바 ‘왜관사건’에 대한 협의로 다시 체포되어 1941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1943년 일제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부친 심산의 주선으로 중경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환국을 앞두고 1945년 10월에 사망했다. 두 형제 모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드러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한 조사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여성 독립운동가의 비율이 3% 정도라고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적어 기록상으로는 남성이 훨씬 많은 편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남겨진 기록 위주로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맹점이다. 최근 들어 여성 포상이 늘고 있으나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뒷바라지하거나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여성들이 많았을 것이지만 제대로 기록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심산의 며느리인 손 여사도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라 할 만한 공적을 쌓은 분이다. 심산과 관련된 여러 서적들과 신문기사들을 보면 손 여사와 심산의 일화들이 언급된 부분이 많은데, 그 몇 구절을 보면 숨은 독립유공자로서의 면모를 쉽게 접해 볼 수 있다.

17세의 나이로 시아버지를 처음으로 뵈었던 손 여사는 시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였을 뿐 아니라 스물일곱에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잃고 모진 고문으로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그림자처럼 바로 옆에서 지켜냈다.

손 여사는 일제강점기 때 김창숙이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국 곳곳은 물론 중국행도 마다치 않았다. 손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를 두 번, 중국 본토를 한 번, 국내는 30여 차례를 오갔다’고 한다.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을 뿐 시아버지 심산의 비밀연락망이 된 것으로 독립운동에 깊숙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어록비, 1928년 대구 형무소 옥중에서 변호를 사절하며 남긴 말씀(독립기념관 소재)
△“착실히 기술을 배워라”

심산의 곧은 의지를 지금도 잇고 있는 손자 김위(80) 씨가 전하는 선생과의 일화는 유림들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를 세웠던 김창숙의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김위 씨의 말에 따르면 심산이 말씀하기를, “자기 세대는 나라를 팔아먹고 망쳐 먹은 세대이니 후대 젊은이를 길러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대학에 들어갈 때는 철학과에 원서를 썼더니 원서를 되찾아오라 시키면서 “너까지 철학 하면 안 된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니 착실히 기술을 배워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쓸데없는 공론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바랐던 심산의 생각이 담긴 말이 아닐지.

할아버지 심산의 말씀에 따라 엔지니어가 된 김위 씨는 지금도 그때 택한 전공(조선공학)을 살려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는 말씀이 좌우명이 됐다면서 애국지사의 후손임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 성주군에서 국비지원을 받아 성주가 낳은 걸출한 위인인 심산의 위업을 더욱 높이고 현창하는 것은 물론 이를 문화관광 자원화 하기 위해 시행하는 ‘심산문화테마파크 조성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도 김위 씨는 들어 나지 않게 조용히 지원하고 있다.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생가 인근에 조성될 공원 부지의 일부를 조건 없이 내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사코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 손 여사가 돌아가신 뒤 생가를 비어 놓고 있음에 부끄러워할 뿐이다.

자조적인 말이겠지만 지금도 회자되는 말에 ‘친일은 삼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은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심산의 삼대는 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손자인 김위 씨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최근 애국지사 후손에 대한 인터뷰 요청에 대해 김위씨는 “특별하게 할 말이 없다”면서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내용을 참작하면 될 것이라며 조용한 어투로 정중하게 사양했다.

△심산 김창숙 어록비의 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변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 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권오항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