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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봄을 맞으면서 만남의 자리가 많았다.

정겨운 얼굴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여 소개를 주고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회식을 겸한 술자리가 많았다.

나를 두고 ‘술자리를 오래 하여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받거나 ‘마음이 좋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개받을 때가 참 난처하다.

속은 쓰려죽겠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술잔을 들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가족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일어서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이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더군다나 누구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좀 해 달라는 청을 받으면 참 난처해진다. 그런데도 미소를 지으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하고는 혼자 힘들어한다.

정중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도 그게 잘 안 된다. 상대방의 면전에서 거절을 못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하면 홀가분할 텐데 그게 안 된다. 이것이 마음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좀 모자라는 사람인가.

능력도 없으면서 상대방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할 줄 몰라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술자리에서도 그렇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라는 소리를 못해서 결국 마지막까지 힘들게 버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그만’ 또는 ‘오늘은 이만’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하고 일어설 줄 알아야 오단이 있는 사람이다. 거절하지 않고 술잔을 주고받아야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이 아니고, 힘들게 부탁을 들어주어야 인간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것이 아님도 알고는 있는데 잘 안 된다.

술잔을 권하면 아예 거절의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받아놓고 보는 버릇, 누가 부탁을 해 오면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알아보겠다고 말하는 습성이 ‘사람 좋은 사람’으로 막연히 평가받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있다.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내가 부모에게서 버려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거의 본능적이라는 얘기다.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고 싶어서 가끔 울기도 하고 떼쓰기도 하는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인 경우 달래주지 않으면 불안감이 증폭된다고 한다. 생후 7개월 정도 되면 아이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못 견딘다는데 ‘분리불안’이라고 한다.

세 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어서 심하면 화장실까지 따라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늘 엄마가 주변에서 반응을 보여주고 안심시키면 아이는 혼자 있어도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정중하게 거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무리한 부탁은 거절해도 상대가 이해해 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절 한 번으로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거절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 어떻게 자랐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불안감이 정중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거나 정중하게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성장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후손들에게 정중하게 거절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 무작정 거절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다.

부화뇌동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떼로 몰려다니는 세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판단력 있게 처신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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