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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이,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들이 참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저기 때문이죠. 젊은 시절과 견주어 봐서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들’이 좀 나아지는지 아니면 더 못해지는지를 살피면 자신의 신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경우는 운 좋게도, 나이 들어 가까워진 사람들이 젊을 때의 사람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렇고, 취미생활에서도 그렇고, sns에서도 그렇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동안 천방지축으로 살아오긴 했지만 전혀 실(實)이 없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몇 년 전까지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직장 선배가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느 날 갑자기 ‘글쓰기 인생’을 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습니다. 2~3년 전의 일입니다. 한 번은 복도를 지나가는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자기 연구실에서 차 한잔 하자는 거였습니다. 차를 한 잔 내오더니 불문곡직 글쓰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해서 자문을 좀 받읍시다. 수필을 쓰고 싶은데 무엇에 가장 주안을 둬야 할까요? 가장 필요한 것 한두 가지만 가르쳐 주세요.”

그때가 아마 그 선배로서는 막 등용문을 통과할 무렵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의주를 얻어 승천을 해야겠는데 무엇인가가 하나가 막혀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에 제가 여기저기 글을 많이 올리고 다닌다니까 혹시 시원한 해결책이라도 있을까 해서 이른바 ‘전문가 조언’을 구했던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발견(發見) 아닐까요?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는 게 원칙이 아닐까요? 그 발견의 기쁨을 독자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이 표현이나 구성의 묘(妙)가 될 것이고요.”

다문다문 지역신문에 칼럼도 싣고 하시는 분이라 다른 말씀을 더 드릴 필요가 없을 듯했습니다. 선배도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발견’이라면?”

“생활의 발견, 사랑의 발견, 희생의 발견, 운명의 발견, 승리의 발견, 아름다움의 발견, 거룩함의 발견, 심지어는 퇴폐나 환멸의 발견이라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발견을 해야 글을 쓸 수 있겠지요.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을 쇄신하는 힘을 가진 것이라면 더 좋고요.”

“맞아요. 근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 혹시 발견의 요령은 없나요?”

“숫돌을 가는 수밖에 없지요. 칼로 내 몸을 깎아내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죠. 자기풍자(自己諷刺)도 손쉬운 한 방법이고요. 수필이면 더 그렇겠죠? ‘농구공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탄력’을 받으려면 자기 이야기를 해야죠. 나이 들어 자기를 감추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겠죠.”

대강 그런 취지의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혹시 너무 나간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전공이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인데 너무 전문성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살짝 반성도 되었습니다. 그분이 얼마 전에 또 복도에서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모더니즘에 대해서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은데…”

이제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한 모양이었습니다. 강의를 청하는 표정이 명실공히 문학적이었습니다. 모모한 수필아카데미의 강사로도 눈부신 활약을 한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어이쿠, 그건 좀 어렵습니다. 그냥 그때그때 문맥을 보고 이해하는 수밖에…”

괜히 또 끌려들어 가 진땀을 흘리는 게 아닌가 싶어 얼른 그렇게 발뺌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본디 발견에는 앞뒤가 없는 법입니다. 늦게 시작한 글쓰기 인생이지만 청출어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글 많이 쓰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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