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28. 영천 도계서원
[서원] 28. 영천 도계서원
  • 권오석 기자
  • 승인 2019년 03월 06일 21시 49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3월 07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효에 또 무엇을 더하리…고된 삶 속에서 안빈낙도 꿈꾸다
도계서원 전경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낮은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작은 서원이 하나 있다.

이곳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가사문학의 3대 시성으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학문과 충효를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이 세운 바로 도계서원이다.

이 서원은 다른 서원에 비교하면 건물이 몇 채 없는 상당히 작은 규모이지만 서원 바로 앞에 작은 저수지가 있어 도계서원의 운치를 더해주며 못 건너편에는 노계 선생의 묘가 있다.
도계서원 현판.
또 그의 문집을 인쇄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노계집(蘆溪集)’ 판목이 서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 대표적 문인인 노계 박인로(1561~1642) 선생은 가사 9편,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겼다.

도계서원은 노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가사문학의 선구자이며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 종군, 해안지방의 만호(萬戶)까지 역임한 노계 박인로(朴仁老)를 향사하기 위해 1707년(숙종 33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를 올리며 선생을 추앙했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70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입덕묘 사당
박인로의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翁)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1561년 6월 26일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노계는 불우한 10대, 20대를 보낸 듯하다. 10대에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며 가난에 찌들어 제대로 글공부를 하지 못했다.

자서전적인 ‘무하옹전’에서 그는 “무예를 거칠게 익혔고, 시서(詩書)에 매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

1592년(선조 25) 노계가 서른두 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찌르고 이때 의병으로서의 세운 공로로 원종공신 명단에 들었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태평사(太平司)’를 지었다.

이듬해인 서른아홉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해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냈고 이어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해 20년간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특히 1601년 전쟁 중 임금을 대신해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 전역의 군대를 총지휘한 4도 도체찰사 이덕형이 영천에 왔을 때 홍시를 대접한 계기로 박인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한국 문학사에 우뚝 선 ‘조홍시가(早紅枾歌)’를 지었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



이 중에서도 ‘품어가 반길 이 없을새’라는 표현은 박인로의 감칠맛 나는 언어 구사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다. 그는 비유적 표현력, 도도한 분위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조가 어우러진 절창의 품위를 보여준다.

이후 노계는 고향에 은거하며 늦은 나이에도 성현을 읽고 따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꿈에 주공(周公)으로부터 성·경·충·효(誠·敬·忠·孝) 네 글자를 받아 그것의 실천이 곧 도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고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1611년(광해군 3년) 종전 후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도를 즐기며 살아가는 대장부의 꿋꿋한 뜻을 노래하는 ‘누항사’를, 1617년(광해군 9년) ‘소유정가’, 1629년(인조 7년) 시조 ‘입암이십구곡’을 지었다.

이 밖에도 1630년(인조 8년) ‘영남가’, 1632년(인조 10년) ‘권주가’와 ‘상사가’, 1636년(인조 14년) ‘노계가’를 짓고 1642년(인조 20년) 82세로 북안면 도천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계 박인로
△노계의 문학

노계는 67수의 시조와 11편의 가사와 많은 한시를 남긴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그는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가사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계의 작품은 종손댁에 필사본으로 전해온 ‘노계집(蘆溪集)’을 저본 삼아 1831년 최제우의 아버지인 최 옥과 정하원이 출간한 목판본 노계집에 대부분 실려 있으며 3권으로 되어 있다.

노계집 1, 2권은 한문으로 된 시문 및 노계에 관한 잡문을 모아둔 것이고 3권이 우리말로 된 가사와 시조이다.
노계집
노계집 판목
노계집 출간 이후 ‘입암별곡과 소유정가’가 발견되었고 또 ‘영양역증’이 발견됨으로써 ‘상사곡’, ‘권주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노계의 가사로는 ‘태평사,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소유정가, 영남가, 권주가, 노계가, 입암별곡’ 등 11편이 있고 ‘조홍시가, 오륜가, 입암이십구곡, 사친, 모현, 노주유거, 자경’ 등의 시조가 있다.

그 외 한문으로 된 부(賦), 시(詩), 전(傳), 기(記) 등이 있어 그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시에는 오언절구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특히 칠언절구로 된 ‘경전가십운’은 농사짓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고 자전적 이야기 ‘무하옹전’과 꿈에 주공을 만나고 쓴 ‘몽견주공기’ 등은 치열하게 도를 닦고 행하던 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계문학의 특징

노계 시문의 주제는 안빈낙도와 충효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작품이 거의 없다. 안빈낙도하고 빈이무원(貧而無怨)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현실의 아픔을 다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당대의 어떤 문인보다도 가난했고 어떤 무부(武夫)보다도 참혹한 전란을 몸으로 겪었다.

그의 시문에는 이런 현실 체험에서 오는 힘과 날카로움이 넘친다. 장현광은 그의 생전에 그의 글을 보고 “문장의 기운이 힘차게 뻗어 나가고 묘사가 상세해 신기하고, 뛰어나고, 훌륭하면서 특별하여 일상성을 박차고 나오는 문체”라고 칭찬했다.
노계문학관
△노계문학관

영천시는 노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도계서원 옆에 영천 3선현 중 한 명인 박인로 선생의 문학정신과 성경충효 사상을 배울 수 있는 노계문학관을 지난 2017년 건립했다.

후손들이 향사를 올리기 위해 모여 있다.
문학관은 조선 3대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생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시실과 60여 명이 수용 가능한 영상실 등으로 구성해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노계시비
노계 박인로 묘소


권오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권오석 기자
권오석 기자 osk@kyongbuk.com

영천 담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