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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글을 쓴다는 것은 공성(攻城·성이나 요새를 공격함)과 같습니다. 글(책)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읽어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처럼, 믿음이 가는 작가가 아니면 독자들은 결코 읽어주지 않습니다. 굳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써 가면서 남의 글(책)을 읽어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써서 독자를 얻는 일은 성을 공격하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가진 화력을 총동원해서 독자가 쌓아놓은 불신의 성벽을 허물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자신의 깃발을 꽂아야 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입니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유명한 문장가입니다. 이미 당대를 풍미한 그의 새로운 글쓰기가 풍속을 어지럽힌다고(지배체제를 흔든다고) 임금님까지 나서서 어명으로 그의 문체를 금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적국 한가운데에 내 깃발을 꽂는다)이라는 글을 보면 글쓰기 병법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지금 읽어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요즘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글자는 병사, 뜻은 장수다. 뜻을 살릴 수 있는 단어와 구절을 잘 운용해야 한다. 글이 안 되는 것은 장수(뜻)가 병사(글자)를 잘 부리지 못한 탓이니 병사를 나무랄 일이 아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글자(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 제목은 적국이고 취하는 논거는 싸움터의 진지다. 적국(제목)은 주제이니 그것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글쓰기의 최종 목표다. 확실한 논거(고전이나 고사)를 진지 삼아서 적국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비하여야 한다. ‘제목에 지지 않는 글’이 좋은 글이다. * 운(韻)과 사(詞)의 운용은 전투에서의 유격병과 같다. 모든 글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운율을 살리고 비유를 잘 활용해야 한다. 속도감 있는 문장 연결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다. 표현의 최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과장도 필요할 때가 있고 반복도 중요할 때가 있다. 마지막 한 줄로 전체 문장을 뒤집는 일도 가능하다. *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 불신의 성벽을 넘어 독자의 공감을 받아내는 데에는 초반전의 승부가 중요하다. 서두에서 ‘제목을 깨뜨리고’ 후반에서 ‘제목을 다시 묶는 일’은 진정한 공감을 얻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소설에서 많이 취하는 극적 아이러니, 운명적 아이러니 등과 같은 구성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함축은 ‘의미가 노는 곳’이다.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의미 구성)를 독려한다.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 전투의 승패는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 상황을 순순하게 받아들여 당면한 글쓰기가 요구하는 적절한 맥락을 잡아내야 한다. 법(규범)은 그 ‘순응’의 결과에 종속될 뿐이다. 오늘의 코드(문법)는 맥락(상황)이 변하면 내일의 오해와 편견이 된다. 항상 ‘때’에 순응하여(자기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매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글이란 것은 독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같은 글이라도 독자의 수준, 처한 입장, 시대적 환경에 따라 전달되는 메시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연암의 ‘소단적치인’은 글쓰기가 숙련 상태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더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제게도 젊어서는 ‘소단적치인’이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 글이 눈에 더 들어왔습니다. 다시 보니 그 안에 다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다시 그것들을 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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