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30. 구미 동락서원
[서원] 30. 구미 동락서원
  • 하철민 기자
  • 승인 2019년 03월 20일 21시 4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3월 21일 목요일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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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출세 마다하고 진리탐구에 정진한 선비의 품격 오롯이


동락서원 전경
동락서원은 인조(仁祖) 때 산림(山林)으로 이름이 높았던 여헌(旅軒)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5년(효종 6)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1601년(선조 34)에 장현광이 지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자리에 세웠다. 1676년(숙종 2) 동락서원으로 사액됐다. 동락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이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며 1932년 사당을 중건하였고 1933년에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를 종향했다. 197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락서원에는 장현광의 유물인 가죽신, 삿갓, 우산대, 지팡이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동락서원 문루인 준도문 ..
경사진 대지를 앞뒤 두 곽으로 나눠 앞쪽 낮은 곳에는 중정당(中正堂)·윤회재(允懷齋)·근집재(謹執齋)·문루인 준도문((遵道門)으로 구성된 강학 공간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사당으로 이루어진 제향 공간을 배치했다. 문루-강당-내삼문-사당을 중심축 선상에 놓고 강당 앞쪽 좌우에 각기 동·서재를 앉혔다. 강당 왼쪽 가까이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뒤편 왼쪽에 신도비각이 있다.
동락서원 강당
묘우인 경덕사에는 장현광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의 동쪽 방은 헌관실, 서쪽 방은 재석실(齋席室)로 사용된다.

신문은 제관의 출입문으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공부장소로 사용된다.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는 곳이다.
독락서원을 지키고 있는 400여년된 은행나무,
이 서원의 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돼 있으며, 유물로는 장현광의 유품 및 문집 7권 등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1㎡만1880 (3600평), 임야 6정보, 대지 3300㎡(1000여 평) 등이 있다.

배향인물

△여헌 장현광

여헌 장현광(張顯光·1554년 ~ 1637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했다.

장현광은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영남에 장현광이 있는데 초야에서 글을 읽은 사람으로 당세의 고사(高士)라고 합니다.”(인조실록 1년 3월 26일)

“학행과 언론이 선비들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니, 장현광을 먼저 발탁하여 등용하면 사람들이 추향을 알게 되어 충분히 고무될 것입니다.”(인조실록 1년 4월3일)

하지만 인조조에 사헌부지평·집의 등에 여러 번 제수됐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괄의 난 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돼 취임했고, 이후 형조참판, 대사헌 등에 제수돼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우참찬에 임명되고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군과 교전하는 한편 군량과 군자물품의 조달과 지원을 주도했으나, 패전 후 실망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듬해 1637년 장현광이 향년 84세로 사망하자 인조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현광의 학덕에 대한 존경과 칭송, 유림의 영수이며 국가원로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곡진하게 표현했다.

여헌의 학풍은 유교의 입장에서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였다. 이황의 학맥이자 영남학파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던 처숙인 정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사숙하고, 그의 문인으로는 허목, 유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전식(全湜) 김응조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허목을 통해 근기남인성리학파와 남인실학파로도 학통이 이어졌다.

△만회당(晩悔堂) 장경우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1581~1656)는 1581년(선조14) 정월에 구미 인동부 인의방(지금의 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1563~1640)이고, 어머니는 진위장군(振威將軍) 이운배(李雲培)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였다.

장경우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여헌 장현광의 수제자로 손꼽힌다. 특히 장경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도 스승 장현광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성심껏 모셨다. 장현광 사후에는 고향에 머물며 여헌문집을 간행하는 등 추숭사업을 주도했다.

장경우에게 장현광은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또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영남 유생들과 상소해 이를 반대했고, 이이첨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히자 이이첨을 참수하라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장경우의 정의로운 성정은 1627년(인조5)의 정묘호란 때도 충분히 발휘됐다. 의병장이 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강화도로 출정한 것이다.

목숨을 건 출정이었다. 하지만 청과 강화했다는 소식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분은 같은 해 진사 합격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637년 스승 장현광이 이승을 하직했다. 56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장경우는 몸을 돌보지 않고 상을 치렀다.

그리고 고향에 머물면서 장현광 추숭 사업을 주도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문집(旅軒文集)’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그 뜻이 널리 시행되도록 권장했다. 또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때 아들인 남파(南坡) 장학(張, 1614~1669)도 장현광 문하에 입문함으로써 무려 3대가 장현광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장경우는 1654년(효종5)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영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다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2년 뒤에 76세를 일기로 만회당에서 눈을 감았다. 만회당은 장경우가 62세 되던 해에 지은 건물로 그의 호이기도 했다. 사후에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장경우의 묘소는 현재 구미 인동동의 정산(鼎山)에 있다. 아울러 임수동에 있는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스승인 장현광과 함께 배향돼 있다.

구미 독락서원 천연대
천연대 는 시경의 대어한록편에 나오는 글로 인륜의 도는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와 같이 행하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서원 우측 담장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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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중서부권 본부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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