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31. 청도 선암서원
[서원] 31. 청도 선암서원
  • 김윤섭 기자
  • 승인 2019년 03월 27일 22시 0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3월 28일 목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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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도 공명도 훌훌 털어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청복을 누라다
선암서원 전경
청도 선암서원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에 있다. 삼족당 김대유(金大有·1479∼1552) 선생과 소요당 박하담(朴河淡·1506∼1543) 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초창은 1568년 (선조 1년)으로 매전면에 있는 운수정에 두 사람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해 향현사라 했다.
선암서원 현판
이후 1577년(선조 10년) 청도군수 황응규의 주선으로 사우와 위패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개칭했으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됐다. 지금의 건물은 1878년(고종 15년)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했다.
선암서원
선암 서원은 튼 ‘ㅁ’자로 이루어진 정침 뒤쪽에 북향해 있어, 여러 건물에 서당 건물이 첨가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 행랑채가 ‘ㄷ’자 평면을 이루고 그 뒤편으로 남향한 선암 서당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우좌 측으로부터 부엌, 방, 마루,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돼 있다.
선암서원 득월정 현판
득월정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구분돼 있다. 온돌방 2칸, 대청 2칸의 단순한 평면이며, 팔작지붕의 홑처마는 선자가 걸린 귀보다 중앙 부분이 훨씬 튀어 나오도록 서까래를 길게 걸었다. 측면은 간주를 세워 2 칸통처럼 하고 충량을 올려 대량에 턱을 걸었다.

부속 건물은 정침으로 출입하게 된 대문칸채(정면 9칸, 측면 1칸)와 맞은편채(정면 8칸, 측면 1칸)인데 고간으로 구성된 것이다.
선암서원 안채 내부
소요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평면 구성은 좌우 퇴칸에 전퇴를 둔 방이 각각 한 칸씩 있다. 1975년 8월 18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됐다.

선암서원 뒤의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해동속소학판목, 십사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돼 있었으나 보관상의 문제로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이다.

예부운략판목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초사전이며 과거시험의 사전으로 송·원나라로부터 수입해온 음운고사전류이다. 원래 세조 10년(1464)에 황종형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김 맹의 글씨로 만든 예부운략이 청도 적천사에 보관돼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이후 제우당 박경전과 국헌 박경윤 형제가 충북 영동에서 원판을 구해와 선조 6년(1573)에 복각한 만력판과 숙종5년(1679)에 박동부에 의해 다시 복각한 강희판이 있다.
선암서원 장판각 현판
도문화재로 지정된 십사의사록판목은 임진왜란 때 밀양박씨 문중에서 부자, 형제, 종반, 숙질 등 14명이 의병운동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일들을 기록한 목판이다. 십사의사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지역 전투상황과 전쟁극복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소상히 제시해 준 점에서 역사적으로 시사해주는 바가 많은 자료이다. 한 문중에서 청도 의병진에 활약했고 14명이 함께 국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궐기했다는 점이 역사상 보기 힘든 사례이다.

선암서원에서 배향하는 김대유(金大有) 선생은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 마을 출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됐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정시(庭試)에 장원해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行誼) 있는 선비를 구할 때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됐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왔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정언 등을 두루 역임했다.

칠원 현감(漆原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 과제(科第, 등과한 자격)를 삭탈 당했다. 향리인 청도에 내려와 소요당 박하담과 더불어 사창인 동창(東倉)을 창설해 구휼 사업에 매진했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되면서 전적에 다시 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청도 운문산으로 되돌아 와서 여생을 마쳤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하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조광조·조식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로는 ‘탁영 연보(濯纓年譜)’가 있다.

박하담 선생은 1516년(중종11)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에 실패하자 청도의 운문산 아래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풍류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서 박하담의 학행을 듣고 감역·봉사·사평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낙향한 김대유와 교분이 두터워 함께 청도 지역에 사창(社倉)을 설치했으며, 조광조 일파가 처형되자 그의 문집을 불태워 버렸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 칠엽산에 묻혔다. 조식·성수침 등과 교류했으며, 저서로는 ‘소요당일고’ 5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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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섭 기자 yskim@kyongbuk.com

경산, 청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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