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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규 문학평론가
미국 내 한국독립운동의 뿌리 하와이 노동이민자. 20세기 말 이후 북한 핵 개발을 두고 동북아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한·미 간 또는 한·일간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아 정부와 국민 모두가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15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 한일관계를 떠올려 본다.

1900년 전후부터 1945년까지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1953년 후부터는 통일이라는 염원 속에 살아왔다. 지금도 통일이 민족의 숙원이다.

지난 2018년 4월 27일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갖고 선언을 했다. 그 선언 후 한반도가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후 일제의 탄압과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1903년 1월 13일 한장호 장인환 등 102명이 캘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이민으로 떠난 것을 시작 1905년까지 여자 677명 어린이 465명을 포함 7,483명이 갔다. 대부분 남자 혼자 떠나 힘든 일 못지않게 외로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런저런 일로 사회는 불안하고 일제탄압이 심화되자 뜻있는 사람들이 중국 미국 등 해외로 나아갔다. 하와이 노동이민이 우리 민족의 미국 이민사회 시작이었다.

1903년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1905년 10월에는 미국 교민 중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한인공업협회를 조직했다. 미국 내 최대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모태가 됐다.

국내에서는 일제가 조선 고종 임금을 강압 1904년 8월 22일 1차 조일협약을 체결 일제가 조선을 실질적 지배가 시작되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국내 사정이 그렇게 되자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 중 계약기 간이 끝난 대다수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하와이 또는 미국 중가주 캘리포니아 등 본토로 망명 일당 근로자 또는 음식점 등 자영업을 하며 전전했다.

1908년 미국에선 하와이 노동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북미대한애국동지회를 결성 항일운동을 시작했으며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은 생활비를 절약 독립운동기금으로 내놓았다. 그것이 미국 내 조선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한 노동이민자는 이대위 김종학 정재관 장경 최정익 현순 임준기 황사용 문양목 민찬호 박장현 이강 장인환 김성무 전명운 백일규 김현주 안원규 홍언 정원명 임초 박상하 강영소 정원도 양은주 김형순 김현구 염만석 윤용호 등이며,유학생 중에는 서재필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신흥우 하상옥 한장호 정영도 황사선 이종철 강영승 정한경 송종익 조병옥 차리석 송석준 정도원 김종림 이관수 김성근 김헌식 윤병구 정순만 등이다.

그 외에도 미국 내 한인사회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조국독립을 위해 뜻을 달리하지 않고 힘을 모았다

그들 중 특히 박용만은 북미 대한애국동지대표회의의장을 맡았으며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항일운동의 요체로 군사양성을 통한 개병주의를 실천에 옮겼다.

서재필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크게 활동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서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조선과 미국에서 독립협회를 만들어 조국독립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으며 독립신문을 발간 불특정 다수 국민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데 기여함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근대민주화에 씨를 뿌리는 데 앞장섰다. 그러면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동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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