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801010003082.jpeg
▲ 맹문재 시인·안양대 교수
근래에 대구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 건립 운동이 한창이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해나갈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창립 총회를 통해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이하는 2020년 열사가 살던 집을 매입해 기념관으로 만들 계획을 밝혔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해주기를 부탁하며 응원을 보낸다. 아울러 필자는 사업 내용에 청옥고등공민학교도 포함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다.

전태일 열사는 1963년 5월 청옥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대구의 명덕초등학교 안에 임시 교실을 두고 있었다. 전태일은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어, 초등학교나 공민학교를 졸업해야만 입학할 수 있는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지만, 학업 의지가 강해 가능했다고 보인다.

전태일의 수기에 따르면 수업은 야간에 진행되었고, 한 학년에 한 학급씩 모두 세 학급이 있었으며, 교사들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학생들이었다. 전태일은 기초 실력이 부족해 영어와 수학 과목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능이 있어 반에서 인기가 많았던 덕에 반 실장이던 학우가 학교에 못 나오게 되자 실장을 맡았다. 전태일은 오후 4시 30분까지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학교에 가곤 했는데, 학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학교 생활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아침에 세수할 때면 코피를 쏟기도 했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전태일은 연중행사로 열린 고등공민학교 대항 종합체육대회의 상황도 수기에 자세히 적었다. 체육대회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전태일은 흥분한 나머지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준비 운동을 했다. 그렇지만 마라톤 시합에서 머리가 어지러워 1등과는 한 바퀴 차이가 날 정도로 뒤처졌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너무 고단한 생활을 해 체력의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래도 배구 시합에서는 서브를 아주 잘 넣어 승리해 날 듯이 기뻐했다. 전태일은 학생들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즐겁게 하는 동안 힘들었던 자신의 서울 생활을 떠올리며 “어떻게든지 공부를 끝까지 해서 지금도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을 그리고 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5원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전태일이 1971년 11월 13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려고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것은 그 다짐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겨울 무렵 아버지는 전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재봉 일을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전태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뇌성번개가 세상을 삼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학업을 중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아버지가 만든 잠바 여덟 장을 들고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잠바를 판 돈으로 사과 궤짝을 사 낙원시장 담 옆에 개집 같은 집을 지어 놓고, 낮에는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렇지만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데다가 동생이 아프기까지 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태일의 학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필자는 2014년 6월 5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인 전태삼을 비롯해 대구의 시인들과 함께 전태일의 생가터, 서울로 떠나기까지 살았던 집, 친척 집, 청옥고등공민학교 등을 찾아다녔다. 대구 사람들조차 열사의 고향이 대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열사의 정신과 함께 이를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필자는 청옥고등공민학교 교실이 있던 명덕초등학교를 찾아간 날을 잊을 수 없다. 열여섯 살에 중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또다시 학업을 중단하면 영영 배움의 길이 막힐 것 같아 절망하던 전태일의 눈물이 떠올라 발길을 떼기 어려웠던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