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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단재 신채호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라고 인간, 시간, 공간을 역사의 3요소로 보았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역사의 한 요소인 1919년의 시간적 의미는 남다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처리할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 1월 18일 개막하고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1910년 이래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대한독립선언서’가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성(길림성)에서 발표되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 39명이 서명했다. 이들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자인 조소앙, 김좌진, 이시영, 이승만, 안창호 등과 대통령장 서훈자인 김동삼, 유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문창범,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조성환 등이다. 또한 대종교 계열의 김교헌, 이상룡,윤세복과 허위의 중형인 허혁도 포함된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공훈을 남긴 분들이 망라되었다.

2월 8일 일본의 심장인 동경에서 최팔용, 송계백, 백관수, 김도연, 이종근, 서춘(친일반민족행위자), 김상덕(반민특위위원장), 윤창석, 김철수, 최근우, 이광수 등의 유학생들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단에서‘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의 민족지도자·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국내적으로 일본 총독부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의 변화를 불러왔고, 국외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은 3월 1일 시작되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에서 농촌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되었다. 박은식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중 7500여 명이 살해당하였고 16000여 명이 부상하였다. 1919년 3월부터 12월까지 검거자 중 19054명이 검찰로 송치되어 이 중 78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자 국내외에서 몇몇 정부가 출현했다. 연해주 신한촌의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년 3월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의회기능뿐 아니라 사법, 행정 기능까지 갖추었다.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을 선출하고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 참모총장에 유동열을 추대하였으며 각계각층의 지도자 70∼80명을 의원으로 선출하였다.

한성정부는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당시 세계적 통신기관인 연합통신을 통해 국내외에 알렸다. 공화제를 채택한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각각 추대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했다. 이날이 1919년 4월 11일이었다. 당시의 각료로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등이다. 이 세 임시정부는 다시 1919년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고 한성정부와 통합하여 통일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9월 6일 1차 개헌에서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한 절충형을 취하였고, 이에 따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취임하였다. 100년 전의 한반도는 한민족이 하나로 광복을 염원했으나, 현재의 한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이자,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고,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가 열리는 한반도의 운명적인 날이다. 그 결과가 남북평화통일로 귀결되기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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