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 70주년

서울탈환작전 중 중앙청에 입성하는 해병대.
올해 창설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의 교훈을 통해 정부가 상륙작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주도로 1949년 4월 15일 경남 창원군 진해읍에 자리한 덕산비행장에서 신현준 초대사령관을 필두로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등 380명의 소수 인원으로 해병대가 창설됐다. 같은 해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추가로 지원받고 해군 14기로 입대한 병사 440명을 해병대 2기로 특별모집해 2개 대대규모로 증설했다.

제주도에서 모집된 3·4기 해병이 주 전력원이었던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해병대는 최초 전투인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와 원문고개 전투, 진동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부산을 위협하는 적을 막기 위해 해병대 최초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김일성 고지 전투 중 진격하는 해병대.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전면 기습남침한 후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한국군은 퇴각을 거듭하다가 7월 16일경 낙동강에 방어선을 가까스로 구축했다.

한국은 국토의 90% 이상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무력화하기 위해 7사단을 경상남도 통영 방향으로 진격시켜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고자 했다.

북한군 제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 대대 약 650명이 1950년 8월1 6일 경남 고성을 무혈점령했다. 저녁에는 통영 입구인 원문(猿門)고개에 진출했고 8월 17일 새벽에는 통영시가지를 완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에 손원일 제독은 급히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고, 8월 17일 통영읍(현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長坪里)해안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해병 제1대대가 기습상륙을 감행했다.

상륙군 제2중대는 8월 18일 새벽에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의 진격을 차단했다. 3중대와 7중대는 통영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해 적군을 격퇴한 결과, 이날 오후에 통영을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통영상륙작전을 취재했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해병대의 작전성과를 보고 ‘이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겠다’고 표현한 데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통영작전 후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 따라 1950년 9월 15일 한·미 해병대는 수도 서울 수복을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작전 개시에 맞춰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대는 2시간 만에 점령하고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 성공시켜 인천을 완전 확보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해병대는 경인지구작전에 나서 인천과 부평을 평정하고 9월 22일 104고지와 연희고지전투를 승리한 뒤 서울 수복을 위해 서울 시가지로 계속해서 진격했다.

2대대 6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소위는 광화문 중앙에 위치한 중앙청에서 염병수, 최국방 해병과 함께 27일 오전 6시 10분께 태극기를 하늘 높이 들어 90일 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수복하였음을 알렸다.

서울 수복 후 연승가도를 달리며 북진하던 해병대는 1·4후퇴 후 다시금 반격작전을 실시해 동부전선의 도솔산에 도착했다.

도솔산은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된 전략적 요충지로 미 해병대 1사단 10연대는 이곳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북한군의 견고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있던 상황.

미 해병대로부터 임무를 인수한 해병대는 6월 4일부터 20일까지 17일에 걸친 치열한 공격을 실시한 끝에 도솔산의 24개 고지를 모두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의 친필휘호를 하사받기도 했다.

도솔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계속 진격하던 해병대는 김일성 모택동 고지까지 점령한 뒤 지역에서 잔적 소탕을 하던 우리 해병대에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게 되는데 수도 서울을 3번이나 뺏길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해병대는 수도 서울을 전방에서 방어하기 위해 파주 금촌에 주둔해 정전(停戰)까지 지켜냈다.

정전과 함께 제1전투단은 제1여단을 거쳐 1955년 1월 15일 해병대 제1사단으로 바뀌게 된다.

4년 만인 1959년에는 1사단이 포항으로 이전함에 따라 그동안 지키고 있던 수도 서울 방어임무를 위해 제1임시여단도 창설됐다.

그렇게 해병대는 포항에서의 교육훈련과 전방의 해안경계작전을 수행하던 중 1964년에 베트남전쟁이 발발한다.
청룡부대 결단식.
당시 삼군의 선봉으로 해병대의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되게 되는데 그때 1사단의 2연대 병력을 근간으로 1965년 9월 20일 포항에서 청룡부대로 알려진 제2 해병여단이 창설된다.

청룡부대 창설 일화로 미국으로부터 베트남전 협력을 요청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에게‘언제쯤 출동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은 ‘6개월 이상 시간이 소요된다’라고 답한 반면,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은 ‘해병대는 언제 어디라도 즉각 출동하는 게 사명인 국가 전략 기동부대다. 1개 대대 상륙단은 24시간 내에, 1개 연대 상륙단은 48시간 내에, 사단 상륙단은 72시간이면 출동 가능하다’라고 답해 해병대의 최초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된 바 있다.
파월 청룡부대 4진 귀국 환영행사.
1965년 10월 3일 부산항에서 출발한 청룡부대는 10월 9일 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한 뒤 같은 해 12월 최초의 여단급 작전인 청룡1호 작전을 시작으로 여러 작전을 성공시키며 작전지역을 평정했다. 특히 베트남전쟁 기간 중 1967년 2월 14일 추라이(Chu Lai) 지역에 주둔 중이던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승리한 짜빈동전투는 1개 중대가 적 정규군 2개 연대와 1개 대대의 야간 기습 공격을 방어해 신화를 남긴 해병의 정신을 이룩한 전투로 평가된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이 부대기를 수여받고 있다.
베트남전쟁에서 개선한 청룡부대는 1972년 3월 10일 그동안 김포반도를 방어한 제5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해 임무를 이어오는 한편 수도 서울 좌측방 방어임무를 수행하다가 1981년 현재의 사단인 2사단으로 재편·창설된다.

한편, 해병대는 청룡부대 개선 후 1973년 10월 10일 군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해체되기도 했다.

그 동안 해군본부 산하 해병참모부에 소속 됐었으나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 개선 필요성이 높아져 1987년 11월 1일에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됐다.
훈련에 임하고 있는 해병대.
이후 2011년 6월, 제1·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 등 서북도서 지역과 해역의 방위를 전담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비롯해 2015년 12월 해군 제주방어사령부의 해체와 함께 제주도와 부속도서를 방어하기 위한 제9여단, 2016년 3월 한반도 전역으로 24시간 내 출동할 수 있도록 해병대 1사단 산하에 3000명 규모의 연대급 신속기동부대를 창설해 꾸준한 발전을 이어오며 대한민국 국군 창군 이래 최초의 육·해·공군 합동 전력 운용 부대로써 책임구역을 방어하고 국지도발에 대비하며, 민관군경 통합방위작전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해오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1기를 시작으로 현재 1244기까지 약 120만명의 해병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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