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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1918~1922)이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경부터 준비하여 11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당되어 1919년 3·1 운동 전후에 크게 활약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이다. 신한청년당은 여운형이 터키 정치인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모방해 지은 것이다.

신한청년당 6인의 발기인은 몽양 여운형(1886년~1947년·대한민국장), 한진교(애국장), 장덕수(친일 반민족행위자), 김철(독립장), 선우혁(독립장), 조동호(독립장) 등이다. 그 밖에도 우사 김규식(대한민국장)과 부인 김순애(독립장)도 합류하고 1919년 4월 이후에 조소앙(대한민국장), 서병호(애국장), 김구(대한민국장), 이광수(친일파), 신규식(대통령장), 김병조(金秉祚·대통령장), 손정도(독립장·손원일 제독 부친), 안정근(안증근의 아우·독립장), 한원창, 이유필(독립장), 김갑수(건국포장), 조상섭, 장붕(애국장), 김인전(독립장), 최명식(애국장), 이원익(애족장), 신창희(애족장), 백남규(대구 출신·애족장), 양헌 등이 가입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1919년 김규식을 이사장에 추대하고 2월 1일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장덕수는 국내와 도쿄로 파견되고 선우혁은 평안도와 경성부, 김철은 천도교와 교류, 서병호와 김순애는 대구지방에 들어가 독립운동과 자금을 얻어왔다. 한편 신한청년당은 일본에 조소앙, 장덕수, 이광수를 파견하여 2·8독립선언서를 하도록 종용했다.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김마리아(독립장)는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알리려고 동경에서 부산으로 왔다가 큰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났다.

한편 여운형은 만주의 서로군정서의 여준(독립장)등을 만나고 연해주에서 이동녕(초대 임시의정원 의장·대통령장), 박은식(대통령장), 조완구 등을 만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신한청년당의 몇 개월간의 활약으로 일본에서의 2·8 독립 선언과 한국에서의 3·1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29인 가운데 무려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김규식’이 세 분이 있다. 한 분은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이며, 또 한 분은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등 서간도에서 활약했던 안동출 신의 김규식(애국장), 나머지 한 분은 북로군정서에서 대대장을 맡아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전한 김규식(독립장)이다.

우사 김규식은 노론 벽파가문으로 일찍 고아로 자라다가 언더우드 목사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학자로 다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1923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미 군정에 의해 수립된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다가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역이었던 김규식의 정치적 이상인 좌우합작운동의 실패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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