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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늘은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을 편의상 종적(縱的) 분류와 횡적(橫的) 분류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독서 방법을 세로로 나누어 보면 초독, 재독, 삼독 등으로 분류됩니다. 한 번 읽기, 두 번 읽기, 세 번 읽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서 방법을 가로로 나누면 투사적(投射的) 독서, 해설적 독서, 시학적 독서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주관적(자신의 경험, 신념에 따른) 읽기, 객관적(공적 의미를 추구하는) 읽기, 초인지적(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읽기로 이름 붙일 수도 있겠습니다.

재독(再讀), 삼독(三讀)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범박하게 말해서 초독 때는 투사가, 재독 때는 해설이, 삼독 때는 시학이 주로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읽기의 횟수에 따라서 점점 이해의 깊이가 더해지고 새로운 생각이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내가 성장하는 크기나 범위에 따라서 지은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집니다. 초독 때는 비약으로 여겨지던 표현이 재독 때는 속 깊은 통찰이나 발견으로 확인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지은이의 화법을 내 속 좁은 이해의 그릇이 담아내지 못해서 생기는 섣부른 원망이 재독, 삼독을 거치면서 눈 녹듯 사라집니다. 초독에서 재독으로 넘어가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런 변화가 크게, 또 자주 일어납니다.

재독은 ‘특별한 내면의 요구’에 부응할 때가 많습니다. 의식은 포착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조회(照會)할 필요가 있을 때 재독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이 자주 사용하는 고전적인 자기표현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무의식이 본능에 친화적이고 당연히 야만적이고 반문화적인 충동일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무의식은 종종 최상층의 문화를 이용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합니다. 특히 ‘목적 없는 책 읽기’ 같은, 순수한 교양 욕구의 표피를 쓰고 오래된 억압들의 게릴라들을 암암리에 풀어놓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독은 무의식의, 무의식으로의, 무의식을 위한, 영혼의 여행입니다. 재독은 겉보기에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집니다. “우연히 이 책이 손에 잡혔다”라는 말이 재독의 독후감 앞에 잘 붙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연애에 있어서의 모든 재회(再會)들이 다 그러하듯, 재독 역시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날 뿐,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초독 때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다만 의식이 눈치채지 못하는 의무적 행사일 뿐입니다.

재독이 무의식의 소관이라는 말을 드려 놓고 보니, “움직이는 정신의 항구에 한 번 정박했던 배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딘가에서 한 번 썼던 말인데, 창작인지 인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인문학 하는 이들이 많이 그렇습니다만) 언제 어디선가 한 번 본 것들을 무심결에 옮길 때가 많은데, 그 출전이 모호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여튼, 거듭 말씀드리지만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다시 찾은 정신의 항구’에서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재독(再讀)일 때 그 책이 왜 내 것인지가 비로소 판명됩니다. 첫인상만 가지고 평생의 반려자를 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양식이 되는 좋은 책은 반드시 재독 이상의 반복적 읽기에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아주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 것이 날마다 서점에 가서 새 책들을 사 오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함께 오래 함께할 수 있어야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사람이나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들어와 내 과거와 현재를 두루 함께 겪은 이가 좋은 반려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책장에서 재독을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책’들을 한 번 뽑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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